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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 소희와 헤어지고 다음 마을로 가는 코스는 계속 산길이다.

오전에 걸은 길은 산길이지만 길을 새로 냈는지 길이 엄청 넓었다.
산티아고에는 이런 길들이 꽤 많이 있다.
아마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언제나 많기 때문에 더 투자를 해서 더 많은 순례자를 불러들이려는 듯하다.
이렇게 길이 좋아질수록 걷는 것이 조금은 쉬워지는 것이니 순례길에 도전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더 나아지는 것이리라.

길을 자세히 보면 옆으로 길을 넓히느라고 흙을 다져서 넓혔고, 거기에는 아직 나무가 하나도 없다.

반대편 쪽에 있는 나무 때문에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그 안에 들어가 자주 쉬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걷는 이곳은 대부분 지평선이 보이는 평지라 지나온 길도 앞으로 갈 길도 그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그늘 한점 없는 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남편과 내가 이렇게 완전 무장을 하고 다녀서 생긴 별명도 있었다.
별명이 뭔지는 그 별명을 붙여준 아저씨를 소개하게 될 때 알려주는 걸로.ㅋㅋ

아무튼 새로 내는 길은 양 옆으로 길을 넓히느라 나무도 없어서 그늘도 없는 길을 계속 걸어야 했는데, 다행히 추가로 더 간 마을까지의 길은 정말로 그냥 산을 하나 넘는 것이라서 그런지 그늘이 많았다.

확실히 달라진 그늘의 양이다.

조금 걷다보니 미국에서 온 예쁜 커플인 폴라와 에릭도 우리처럼 다음 마을까지 걷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걷는 게 다르다.
우선 아침에 우리보다 항상 늦게 출발하는 것 같다. 아마도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언제나 늦잠을 자는 것 같다.
이들의 걸음이 빠르진 않지만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인지 언제나 오후가 되면 우리를 추월해 간다.
내가 뒤에서 그들과 걸음수에 맞춰 걸어 봤는데, 같은 걸음수여도 언제나 그들이 훨씬 앞서 간다. 다리 길이가 달라서 보폭이 다른 것이다. 숏다리의 비애다.ㅜㅜ

산길을 걷다가 나무 그늘에서 그들과 같이 앉아 쉬는데, 폴라는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걷는 게 힘이 들다고 하고, 에릭은 물집이 잡힌 것은 없는데 무릎이 아파서 보호대를 하고 걷고 있다고 했다.
그들도 오후에 걸을 때 우리와 자주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한다는 걸 아는지, 우리가 자주 만나는 이유에 대해 자연스레 대화의 화제가 되었다.
폴라 말로는 우리가 걸음이 너무 느려서 언제나 자기네가 앞서 가는데, 앞서 가다가 자기네는 또 언제나 담배를 피느라고 한참을 앉아 있어서 그때 우리가 앞서가게 된다고 했다.
비슷하게 걷는 일행들 사이에서 우리가 걸음이 느린 것도 유명하지만, 그들이 담배를 엄청 피우고 술을 엄청 먹는 것도 유명했다.ㅋ

폴라와 에릭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내가 참 좋아하던 커플이었다.
그들은 머리는 여러가지 색으로 염색을 했고, 눈에 확 띠는 분홍 남방을 커플로 입었고, 여기저기 타투도 했고, 맥주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줄담배처럼 피고, 꽤나 자유로워 보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이랑은 잘 안 어울리고, 말할 때도 매우 수줍어해서 폴라는 약간 흥분된 어조로 빠르게 말을 했고, 에릭은 언제나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말을 했었다. 참 흥미있는 커플이다.

우리도 그들과 친해지려고 많이 말도 걸면서 노력을 했는데 친해지는데 아주 오래 걸렸다. 아마도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서 그런 듯하다.
그들은 미국사람이라 그런지 아니면 젊어서 그런지 영어를 매우 빠르게 말하고 발음을 많이 굴린다.
게다가 그들도 천천히 어눌하게 하는 우리의 영어를 잘 못 알아 듣는다.
걷는 속도가 비슷해 오후에 아주 여러 번 마주쳐서 더 친해지고 싶은데,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의 안부만 묻는 것 외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계속 있어서 안타까웠다.
나중에 좀더 친해진 계기가 있었는데, 그때의 이야기는 그 사건이 터진 날 풀어 볼 생각이다.ㅋ
아무튼 이때는 많이 친하지 않아서 자주 마주쳤지만 같이 찍은 사진도 없었다.
난 언젠가는 이 커플과 사진을 찍겠다는 작은 목표가 있었을 정도로 아주 마음에 드는 커플이었다.

사람이 사는 마을에 가까이 오니 제법 큰 나무도 보이기 시작한다.
저 앞에 있는 나무가 마치 곧 마을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아 매우 반가웠다.

이렇게 큰 아름드리 나무도 있다.

다음 마을에 도착하니 마을은 이전 마을 보다 조금 더 큰 정도였다.
알베르게도 세 개 정도가 있었다.
초입에 있던 알베르게에는 한글로 “매운 스파게티, 한국인 추천”이라고 써 있었다.
반가운 한글에 매운 스파게티라는 것이 조금 끌리긴 했지만, 너무 초입에 있어서 우선 마을 중앙까지 가 보기로 했다.
순례길에 한국인이 점점 많아지는 추세라더니 이런 홍보도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아쉽지만 이 알베르게는 그냥 지나쳤다.

마을 중앙까지 걸어가 보니, 거기에는 공립 알베르게와 사립 알베르게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었다.
이제 점점 산티아고의 분위기가 익숙해지는지 우리는 대충 겉에서 봐도 알베르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공립 알베르게는 싸서 그런지 시설이 좀 열악한 경우가 많다.
대도시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는 시설을 잘 갖춰어 놓기도 했지만, 어쨌든 수용 인원이 많아서 좀 덥다.
사립 알베르게는 두배 정도의 가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보통 규모가 작아서 방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자지 않는다. 그래서 많이 덥지 않다.
시설도 여러 면에서 깔끔하고 편하다.

살짝 염탐해 보니 사립 알베르게가 훨씬 좋아보여 그곳에서 자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아는 사람들은 거의 이 마을까지 걸어왔다.
공립 알베르게 앞에 의자를 동그랗게 가져다 놓고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놀고 있었는데, 거의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전 마을에서 안 자고 여기까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대부분의 친구들이 있는 공립 알베르게는 뒤로 하고 사립 알베르게로 갔다.
이 알베르게는 손님이 많아 본채 말고 옆에 있는 시골집 하나를 개조해 두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알아낸 것이 있는데, 브라질 팀이 묵는 숙소와 음식점은 검증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벌써 세번째나 산티아고에 온 고수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도 이 알베르게에서 묵고 있는지 로비에서 만났다.
그렇다면 이곳의 시설은 믿을 수 있다.
본채에는 주인이 운영하는 식당도 있고 세탁장도 있어서 편하고 좋지만 이미 침대가 다 나가고 없고, 건물 뒤쪽에 있는 개조한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곤 소개 받은 침대는 자그마치 우리 둘만 따로 잘 수 있는 독방이었다.(독방이라고 하니 좀 이상하네.. 그 용어가 있는데, 생각이 안 난다.ㅜㅜ)
산티아고에 온 후로는 언제나 최소 10명, 많으면 100명까지 한 공간에서 자야했는데, 이 독방의 침대만 남았다고 한다.
3층 꼭대기에 있었지만 독방이므로 원래는 비싼데,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라며 다른 침대와 같은 가격으로 해주겠다고 했다.
완전 땡 잡았다.^^
정말로 오래간만에 다른 사람의 코고는 소리나 부시럭거리는 소리, 삐걱거리는 이층침대 소리 없이 잘 수 있는 날이 온 것이다.

천장이 조금 낮은 다락방 같은 곳이었지만, 침대도 이층 침대가 아니고 단층 침대가 있었다.
너무 신나서 짐을 풀고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마을 구경도 하고 저녁도 먹으려고 나왔다.

저녁은 미국에서 온 루시아가 추천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알베르게에서도 추가 요금을 받고 저녁을 제공해준다는데, 로비에서 만난 루시아가 자기가 갔다온 다른 식당을 알려주며 그리 가라고 해서 알베르게 주인에게 미안했지만, 루시아의 제안도 무시하기 그렇고 해서 그냥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그리고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보통 빠에야로 정해져 있어서 선택할 것이 없다.
오늘은 예상보다 추가로 더 걸은 우리에게 주는 보상으로 다양한 메뉴 중에서 먹고 싶은 것으로 골라 먹을 수 있는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씨에스타 시간이 끝나고 레스토랑이 문을 열기 전까지 마을 구경을 하려고 했는데, 두 알베르게 주변으로 집이 대 여섯 채 있는 것이 이 마을 구조의 전부였다.
어쩔 수 없이 알베르게 앞 테라스에서 레스토랑이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 때문에 이렇게 그늘막이 안 쳐 있으면 밖에 나와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옆에는 먼저온 사람들의 빨래가 바삭하게 마르고 있었다.
빨래 하나는 정말로 끝내주게 잘 마르는 스페인의 태양이다.ㅋ
빨래를 널러 나온 브라질 팀의 벳토와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레스토랑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루시아가 맛있다고 강추한 닭고기 어쩌구하는 요리와 파스타 그리고 샹그리아 한병ㅋ


국물요리 맛에 빠져 주문한 스프와 샐러드는 요리 나오기도 전에 뚝딱!

지방색이 많이 보이는 음식이었다고 할까? 아무튼 특색있는 식당이었다.
저녁 먹으며 와인 한잔하며 사진도 찍었는데 피곤해지니 웃음끼가 싹 달아났다. 더는 마을 구경할 것도 없고 해서 오늘은 일찍 자기로 했다.

방에는 스페인 시골집에서 쓸 거 같은 가구도 좀 있고, 창문으로 길가도 보여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고, 가까운 곳에 성당도 있는지 종소리도 들리고...
마치 스페인 시골에 농가체험이라도 하는 기분이 드는 그런 방이었다.
팜플로냐에서 출발해 여지껏 계속 여러 사람이 함께 자는 숙소에서 자느라 왠지 푹 못잔 거 같은데, 오늘은 작정하고 일찍 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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