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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2017.6.16(41,357걸음)
오늘은 산토 도밍고에서 벨로라도까지 걸었다.
전체적으로 평지이지만 엄청나게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해야 한다.
이게 고난의 길이 될 줄이야...ㅜㅜ
오늘도 20킬로 초반대라 만만했지만, 문제는 우리 발에 잡힌 물집이었다.
어제 저녁을 같은 식당에서 먹으면서 부쩍 친해진 브라질팀과 아침에 출발하기 전 숙소 앞에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얼굴이다.
특히 엘리오는 나이가 많고 영어를 전혀 못해서, 이렇게 사진을 찍으며 서로 친분을 교류하는 것을 매우 즐거워한다.
이들도 우리처럼 걸음이 매우 느리기 때문에 이렇게 아침에 같이 숙소에서 출발하면 거의 같은 속도로 목적지까지 함께 걷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문제의 물집 때문에 이렇게 아침에 보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번도 못 마주쳤다.
그만큼 오늘 우리의 걸음은 더뎠다.
우리가 발에 잡힌 물집에 대처하는 방법이 처음엔 너무 어설펐다.
어쩌면 이런 상식은 산티아고에 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찾아 알고 왔으면 더 좋았을 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더라도 이렇게 심각하게 아플지는 상상도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물집이 한두개 생겼을 때는 무심하게 생각했었다.
‘뭐, 물집이 터지고 물이 마르면 살껍질 한겹 벗겨지고 말겠지.’
라고 아주아주 만만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물집의 양상은 그렇게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물집이 잡히고, 그걸 터뜨리고,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아무리 처방을 해도 매일매일 물집 잡힌 곳에 물이 차 오른다.
그러면서 점점 크기도 커지고, 다른 곳에도 생긴다.
가장 먼저 생기는 것은 발가락이다.
발가락에 생긴 물집은 걸을 때 발 앞부분의 통증을 가지고 온다.
특히 내리막을 걸을 때는 신발 안에서 발이 앞으로 쏠리기 때문에 그 통증이 극에 달한다.
우리는 며칠 동안 내리막에서 걸을 때 물집 때문에 눈물이 질금질금 나게 아팠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처방은 그저 뒤로 돌아 거꾸로 걸어 내려 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발가락에 생긴 물집에 신경쓰며 걷다보면 다음 물집은 뒷꿈치에 생긴다.
이 물집은 발의 뒷부분의 통증을 담당한다.
특히 오르막을 걸을 때 신발 안에서 발이 뒤로 쏠리기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이쯤 되면 내리막도 오르막도 다른 형태의 통증으로 모두 걷기가 힘들어진다.
내리막에서 뒤로 돌아 걸을 수도, 오르막에서 그냥 앞으로 걸을 수도...
그나마 한껏 요령을 부린 게 옆으로 게걸음을 걷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집이 생기는 곳은 발바닥이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면 거의 걷는 걸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는 평지도 걸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걸을 수 있는 길이 없다.
이렇게 물집에 대해 정리하는 지금도 그때의 통증이 그대로 생각나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ㅋ
참고로 물집은 처음 잡힌 것이든 나중에 잡힌 것이든 아무것도 차도가 없이 꾸준히 아프다.
그나마 천만 다행인 건, 엄살이 심한 나는 발바닥에까지는 물집이 안 잡혔다는 것이고, 발바닥까지 물집이 잡힌 남편은 끝까지 고통을 참고 이겨낼 참을성이 있다는 것 정도이다.
밴드를 발에 덕지덕지 붙이고, 양말은 두개씩이나 신고 나선 새벽의 산티아고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상쾌하다.
여전히 멋진 밀밭과 멋진 하늘, 멋진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또 새로운 광경을 보여주었다.
소박하게 보이는 흰꽃이 보이는 이 작물이 밭에 심겨져 있었다.
물론 그 밭 또한 엄청나게 넓었다.
그래서 그 흰꽃의 물결이 사람의 발길을 잡기에 넉넉했다.
그때는 그저 흰꽃의 자태에 감탄해서 이렇게 저렇게 사진을 찍어두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것도 양귀비 꽃이라고 했다.
밭 가장자리에 핀 빨간 꽃도 양귀비 꽃인데, 빨간 꽃은 잡초처럼 밭 가장자리에만 피어 있었고, 흰 꽃은 아예 밭자리를 차지하고 재배를 하는 것이었다.
뭐 우리가 스페인의 농업에 대해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우리끼리 상상하며 있는 그대로 감상하기로 했다.
여행하면서 보는 모든 것을 알려고 하면 왠지 여행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보고, 들리는 건 듣고, 느끼는 건 느끼고, 생각하고 싶은 건 생각하며 하는 여행이 즐겁다.
우리의 이번 여행은 저절로 그렇게 되고 있었다.
목적지까지 20킬로를 걷는 내내 우리가 오늘 찍은 사진은 몇개 안된다.
오늘 우리는 오전에 흰 양귀비꽃을 구경했던 것 외에는 오직 발에 잡힌 물집과 사투를 벌이는 일밖에 없었다.
특히 남편이 심각하게 많이 아파했다.
평범해서 그닥 볼 것도 없었던 이 작은 마을에서 우리는 발에 생긴 물집이 너무 아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제 슈퍼에서 산 견과류랑 마을 식수대에서 받은 시원한 물을 마실 때까지는 남편의 발이 그렇게 심각한지 몰랐다.
다 쉬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남편이 발이 너무 아파 신발을 거의 신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집 잡힌 것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양말을 벗어보니, 어제 비싼 돈을 주고 산 밴드가 물집의 물을 잘 빨아들이긴 했는데, 접착력이 너무 좋아서인지 그 밴드를 떼는데 물집을 감싸고 있던 살점을 같이 뜯어내(으으으으으으ㅜㅜ) 시뻘건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매우 쓰라려 했다.
게다가 밴드가 머금은 물이 딱딱하게 굳으면서 오히려 걷는데 마치 돌로 된 지압 신발을 신고 걷는 것처럼 통증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비싼 밴드가 오히려 더 상처를 심각하게 만든 셈이다.
어쨌든 다시 약을 바르고 일반밴드를 붙이고 양말도 두개나 신고 신발을 신고 출발했지만 몇걸음 못 가서 다시 주저앉았다.
그렇게 여러 번을 쉬고 걷고 다시 쉬고 다시 걷고를 반복하면서 그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린 물집의 블랙홀에 빠져버린 듯했다.
어느 집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다시 처방을 하고 있는데, 그 집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오셔서 우리를 보고 엄청난 스페인말을 쏟아내며 걱정을 해주셨다.
그리고 그 소란에 지나가던 순례객 두분이 이번에는 프랑스말로 호들갑스럽게 걱정을 해주셨다.
소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분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붕대를 주셨다.
밴드 말고 붕대로 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스페인 할머니는 집으로 들어가시더니 반창고와 가위를 들고 나오셨다.
그들의 프랑스말 스페인말 지도를 받으며 붕대와 반창고를 붙이던 남편도 발이 너무 아프니까 한국말로 말을 하고 있어서, 아무 말도 통하지 않는 여러 사람이 한참을 수선을 떨다가 상황이 마무리가 되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둘러보는 가운데서 남편과 나는 발가락 마다 붕대를 감고 반창고를 붙이면서 프랑스분들에게는 “메르씨”라고 그리고 스페인 할머니에게는 “그라시아”라고 연신 인사를 했다.
이렇게 처치를 했지만, 사실 남편은 전혀 괜찮은 게 아니었는데 프랑스말이든 스페인말로 더 설명할 방법도 없고 해서, 그냥 신발을 신고 걷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아마도 붕대를 감으니 신발을 신은 후 걸을 때 압박감이 더 심했던 것 같다.
우리 둘이 걷게 되자 남편은 또 걷기를 포기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래서 내가 남편의 배낭을 메고 가보기도 했다.
발이 너무 아프니 하중을 주는 배낭이라도 가벼운 것을 메라고 바꾸어서 메고 갔다.
하지만 남편보다 심하지는 않지만 나도 발에 물집이 여러 개 잡혀있는 상태였으므로, 배낭을 바꿔 메고는 나까지 덩달아 걸음이 느려졌다.
짐이 무거우면 물집이 더 심하게 잡힌다며 남편이 다시 자기 배낭을 메고 걸으면서 우리는 둘다 완전히 슬로우 모션으로 걸었다. 두... 두... 두... 두... 두...
이런 우리의 걸음을 누가 옆에서 보면 완전 웃겼을 것이다.ㅋ
끝이 안 보이는 산티아고의 길은 빨리 걸어도 그 끝이 신기루처럼 자꾸만 멀어지는 것 같다.
그 끝이 안 보이는 길을 숨 한번 쉬고 한걸음 걷고, 숨 한번 쉬고 한걸음 걷고 하며 걸은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해는 점점 높아지고, 햇살은 점점 뜨거워지고, 지체할 겨를이 없어 점심도 안 먹고 걷느라 배는 점점 고파지고, 완전 최악이었다.
나중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 걷고 난 후, 그때를 추억할 때마다 남편은 “나 그때 진짜 울고 싶었어. 그냥 그만 걷는 걸 포기하고 싶더라구.”라고 말하곤 했다.
아마도 걷는 중에 그 말을 했으면 우리의 산티아고 길은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만큼 나도 남편도 그날은 최악이었다.
이 사진은 지금 봐도 처절하다.ㅜㅜ
난 남편이 그날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남편이 짚고 걷던 등산 스틱을 버릴 때 알았다.
사람마다 걷는 스타일은 다르다.
나는 지팡이나 스틱이 오히려 걷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팔보다 다리가 튼튼한 것 같다.
지팡이나 스틱을 짚으면 다리는 조금 편해지는 것 같지만 그보다 더 많이 지팡이를 들고 가는 팔이 피곤하고 아프다.
그런데 남편은 스틱을 선호한다.
짐의 무게를 다리와 스틱에 분산시켜주기 때문에 걷는 게 훨씬 쉽다나 뭐라나.
사실 산티아고를 걷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팡이나 스틱을 짚고 걷기 때문에 남편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던 남편이 스틱을 버렸다.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 쓰라며 산티아고 길의 표지석 옆에 딱 박아놓았다.
어쩐지 이렇게 놓고 가려니까 길에서 가끔 마주쳤던 추모비같은 생각도 들고 해서, 잠깐 서서 스틱의 안녕과 우리 발에 생긴 물집이 호전되길 기원했다.
스틱을 버린 남편은 이후 목적지까지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말 없이 평소보다 열배는 열심히 걸었다.
발이 갑자기 나은 것도 아니고, 발이 아무리 아파도 다음 마을이 오늘의 목적이니 거기까지는 걸어야 하니, 아픈 시간이라도 단축해야겠다는 생각이었던 듯 싶다.
그렇게 걸음을 서둘렀지만 스틱을 버리기 전까지 너무 느리게 걸었던지라, 오늘 걸어야 하는 거리가 21킬로로 매우 짧았는데도 1시면 도착했을 곳을 4시가 넘어 겨우 도착했다.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냐면... 그 이후로도 이날처럼 육체적으로(ㅋ) 힘든 날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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