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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엔 약간 오르막 길을 걸었다.
산티아고길의 법칙 중 하나,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고 나면 그 꼭대기에는 언제나 시원한 음료를 파는 푸드트럭이나 좌판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른 오르막이 끝나는 제일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도 어김없이 과일과 음료를 파는 좌판이 있었다.
근처 마을 청년들이 몇몇이 모여 운영하고 있는 과일과 음료수를 파는 좌판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많은 사람들이 다리가 아플 뿐 아니라 배도 고프고 목도 탈 타이밍이다.
그래서 이렇게 만나는 좌판은 순례자들에게 마치 오아시스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오늘은 날씨가 변수가 되었다.
구름이 잔뜩 낀 스페인의 여름은 절대로 덥지가 않다.
살랑살랑한 바람 때문에 걸으면서 콧노래가 절로 나올 것처럼 아주 상쾌하다.
그러니 다들 목이 타게 걷지를 않았다.
꼭대기에 오른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아침에 챙겨온 물을 다 마시지도 않았고, 시원한 탄산 음료나 과일이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 모두 잠시 앉아서 간단히 쉬고 계속 걷는다.
마을 청년처럼 보이는 오늘의 좌판을 벌린 사람들은 이런 날은 공치는 날인 것이다.
동네부터 따라온 것같은 강아지만 시원한 바람 속에서 컹컹대며 뛰어다니고 있다.
우리도 다른 날 같으면 먹지도 않던 콜라를 사서 정신없이 들이켰을텐데 오늘은 그냥 앉아서 쉬면서 여유있게 사진이나 찍고 그랬다.
우리 사진 속에 독일에서 온 아가씨들도 찍히고 브라질에서 온 엘리오와 로지도 찍혔다.
일행인 벳토는 걷기 좋은 오늘같은 날은 여유있게 경치를 구경하면서 앞서 걸어간다.
엘리오와 로지는 세번째 오는 산티아고라 걷는 것만 열심히 하고, 벳토는 처음 오는 산티아고라 구경하는 걸 더 열심히 한다.
항상 벳토가 앞질러 가다가 어느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엘리오와 로지를 기다린다.
아마도 엘리오가 나이가 많아 걷는 게 느린 듯하다. 특히 오르막길에서는 엘리오와 로지가 많이 뒤쳐진다.
물론 그래도 우리보다는 잘 걷는다.
오르막이 끝나는 이곳에서 그들을 만났으니 이후부터는 우리를 앞질러 갈거라 오늘은 더이상 길에서 못 볼 것이다.
이들은 느리게 걷는데, 아무래도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아무튼 우리보다 언제나 잘 걷는다.
외국 사람들이 다리가 길어서 잘 걷는 건 내가 실험해 봤다.
앞에 가는 외국인의 걸음 수에 맞추어서 내가 걸어보면 그닥 빠르게 걷지 않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박자를 맞추어서 정확히 같은 걸음을 걷는데, 그는 내 앞에서 점점 조금씩 점점 멀어진다.
내가 그들의 보폭을 따라갈려고 맞추면 말 그대로 가랭이가 찢어질 것이다.
아마도 한 걸음에 20cm는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우리가 보통 하루에 4만 걸음을 걸으니까 자그마치 하루에 8킬로가 차이가 난다.ㅜㅜ
그러니 다리 짧은 우리에게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더 대단한 도전이지 싶다.
그리고 난 이 꼭대기 마을을 지날 때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자그마치 집에서 나선지 일주일만에 처음으로 화장실을 가고 싶은 원초적 신호가 온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지만 집 나가면 잠도 설치고, 화장실도 잘 못가는 버릇이 있다.
그 꼭대기 마을에는 근처에 멋진 휴양지가 있는지 순례자들이 들리는 그런 레스토랑이 아닌 정말로 호화로운 레스토랑이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절대로 들어가지 않을 그런 비주얼의 레스토랑이었는데, 급한 나머지 우선 들리기로 했다.
배도 안 고프니 커피 한잔씩 시키고 난 화장실로 직행!
고급 레스토랑이다 보니 화장실도 비까번쩍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난 거기서 아주 시원하게 볼 일을 보았다.
내 생각에는 그 이후로 나는 모든 생체 리듬이 산티아고 순례자의 그것으로 바뀌어 버린 듯하다.
컨디션 완전 최상급으로 전환되고, 그때부터 난 산티아고에 완전히 적응하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날 내 몸속에 '여행자의 유전자'가 생겨난 듯하다.
산티아고 길에는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많이 있다.
이런 순례자들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상 등만 모아두어도 괜 괜찮은 전시물이 될 정도이다.
오늘 걷는 길에도 멋지게 순례자 조형물을 만들어 놓은 것이 있었는데, 다리가 너무 아픈 관계로 길 건너 있는 것을 멀리서 그냥 사진만 찍었다.
아마도 이때는 여러 가지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발이 점점 아파왔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왠지 마음이 조급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남편은 다시 산티아고에 간다면 그 길 주변의 이것저것들을 다 구경하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하루 20킬로에서 30킬로를 걷다보면 길에서 한발짝도 안 벗어나고 걷게 될 것이 뻔하다.
스페인의 여름 날씨는 우리나라의 여름 날씨와 완전히 다르다.
정말 무더운 날은 하늘에 구름이 없고 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리비치고 하는 아주 햇살 따가운 날씨이다.
게다가 메세타 지역은 그늘을 만들어줄 건물도 큰 나무도 거의 없어서 쉬지 않고 땡볕을 몇 시간씩 걸어야 한다.
그러다가 저녁8시쯤 되면 해가 기울면서 시원한 바람이 분다.
10시쯤 해가 지고 기온이 많이 떨어져 새벽엔 쌀쌀해서 이불을 덮어야 한다.
스페인은 낮은 엄청나게 덥지만, 저녁에 잘 때는 완전 시원해지는 그런 날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낮부터 구름이 있는 날은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 약간 쌀쌀한 가을 날씨 같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좀 많이 춥다고 느껴질 정도로 춥다.
이런 날은 여러 모로 침낭 속이 안전하다.
추위도 막아주고 베드버그도 막아주는 침낭은 그래서 산티아고 여행의 필수 아이템이다.
아무튼 스페인의 여름 날씨는 우리나라의 습한 여름 날씨와 매우 다르다.
밀밭에 밀은 아직 익지 않아 초록색을 더 많이 띠고 있다.
매일 밀밭과 보리밭 옆을 걷다보니 처음에는 밀과 보리를 구분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색깔 말고도 모양을 보고 구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처음엔 구분을 못해 그냥 다 밀밭인 줄 알았고, 다음에 수확시기가 달라 노란 건 보리이고 약간 초록색인 건 밀이라고 구분했고, 이제는 이삭 끝에 수염이 길게 나 있으면 보리고 짧게 나 있으면 밀이라고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멀리서 보면 벼와도 구분이 잘 안되겠지만, 가까이서 보면 벼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농작물도 계속 보면 아는 농작물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최근 몇년 간 봄과 초여름의 가뭄이 극심해 시골에서는 모내기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자주 생기고 있다.
우리나라는 주로 벼를 심는데, 벼의 경우에는 물이 매우 많이 필요한 작물이기 때문이다.
논에 물을 한가득 담아두고 모내기를 해야 하는 우리 농사법 때문에 농민들은 봄 가뭄에 큰 고생을 한다.
반면에 밀과 보리는 밭에 물을 담아두지 않아도 지을 수 있어 이렇게 고지대에서도 광범위하게 농사 짓는 걸 보니 약간 부럽기도 했다.
부러운 것이 그것 뿐이 아니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땅에 콩깍지가 떨어져 있어 주워서 열어 보니 우리가 많이 먹는 완두콩이었다.
그리고 저멀리 밭에는 콩을 수확하는 대형 차가 여러 대 밭을 오가고 있었고, 길가에는 수확한 콩을 실어갈 대형 트럭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 저기 내옷 팔에 구멍 난 게 찍혔네?ㅋㅋ 어느 더운 날 더위에 취해 휘적휘적 걷다가 남의 집 대문에 걸려 있는 우체통에 긇겨 찢어진 것이다.
팔뚝에 그때 긇힌 흉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땐 너무 더워서 상처가 난 것도 옷이 찢어진 것도 몰랐다는...
땅에서 주운 콩을 들고 가다가 트럭 운전수에게 “저기서 수확하는 것이 이 콩이에요?”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정말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 시골에서는 콩도 손으로 심고, 콩밭에 엎드려 풀도 뽑고, 수확을 해도 이제는 손으로 콩타작은 안하지만 탈곡기를 써서 수확한데도 많아야 몇 가마 수확하고 그런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좋아하는 “콩밭 메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누나~’하는 노래도 스페인 농가에서는 절대 공감 못할 노래일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콩을 수확하면 그것으로 메주를 쑤어 장을 담거나 두부를 만들어 먹거나 콩국수를 해 먹는 게 다일 것이다.
스페인의 콩은 특히 오늘 우리가 길에서 본 이 콩은 통조림으로 만들어져 전세계에 수출하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규모가 다른 넓은 땅을 가진 나라와 농사로 어깨를 견줄 수가 없다.
우리나라 시골이 점점 노령화 되어 가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스페인의 농가는 어떨지 궁금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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