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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날씨가 흐려서 뜨거운 햇빛에 맞서며 걸을 필요가 없었다.
바람까지 선선히 불어 진짜 쉽게 걸을 수 있었고, 그래서 목적지에 오후 1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도착했다.
이렇게 일찍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숙소는 일층에는 로비와 주방, 휴게실 같은 것이 있고, 이층에 올라가면 이렇게 여러 개의 방에 여러 명의 사람이 자는 구조였다.


창문 하나에도 산티아고 분위기가 물씬 난다.
밖은 환하지만 숙소는 좀 어둡다.
시에스타 시간을 이용해 자는 사람을 위한 배려이다.

숙소에서 보니 언제나 일찍 도착하는 선두 그룹에 속한 사람들도 이제서 장을 봐 점심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동안은 그 시간에 우리는 길에서 걷고 있었으므로 선두 그룹이 점심 먹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독일에서 바이올린 제작을 공부하고 있다는 한국인 학생 공석찬과 처음으로 긴 대화를 할 수도 있었다.
그가 바이올린의 소리에 빠져 그걸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된 사연, 바이올린이나 기타 연주를 배우고 있는 이야기, 사촌 동생과 함께 산티아고를 걷는데 동생 장비까지 준비하느라 힘들었던 이야기 등등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함께 사람들이랑 밥을 요리해서 먹으면 밥과 술까지 해서 일인당 2, 3유로밖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보통 젊은 사람들은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예산을 잡을 때 1킬로에 1유로라고 잡는다고 한다.
즉, 전체 길이인 800킬로를 걸으면서 800유로로 먹는 것 자는 것을 모두 해결하는 것이다.
아주 재미있는 산티아고만의 여행 경비 계산법이다.^^

직접 요리를 해서 먹으면 식비가 엄청 적게 든다는 건 우리도 그간의 유럽여행에서 경험해 봤다.
특히나 북유럽 같은 곳에서는 식비도 엄청 비싸서 여행 준비물에 '장바구니'가 필수품이라고 할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 산티아고 여행에서는 걷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밥은 사먹기로 해서 이렇게 밥을 해먹는 사람들의 여행 스타일은 잘 모르고 있었는데, 오늘 들어보니 정말로 저렴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 산티아고 여행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사실 다른 유럽 여행에 비해 산티아고 여행은 경비가 매우 적게 든다.
여행을 하다 보면 숙박비와 교통비 그리고 식비가 제일 큰 몫을 차지한다.
그런데 산티아고에서는 숙박비가 말도 안되게 저렴하고(6,000원에서 12,000원 정도), 교통비는 걸어가기 때문에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식사비 정도는 지출해도 큰 돈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산티아고 길에서는 순례자 메뉴라고 저렴하고 푸짐한 메뉴가 있어 더 부담이 안 된다.
순례자 메뉴는 에피타이저와 메인 요리 그리고 후식과 와인 한병, 물 2리터 짜리 하나를 주는데 10유로면 된다.
둘이 하나를 시켜 먹어도 충분할 정도의 양이어서 그렇게 주문해도 순례자들이기 때문에 식당에서는 아주 친절하게 대해준다.
우리나라의 몇몇 식당에서처럼 '2인분 이상 주문 가능'이라는 야박한 문구가 여기엔 없다.


석찬씨와의 대화를 마치고, 알베르게 옆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히 빠에야 하나를 시켜서 맥주 한잔씩했다.
길 어디든 그늘이 있는 곳에는 이렇게 가게에서 야외 테이블을 놓아두었다.

보통 땐 그냥 걷는 시간이라 특별히 허기가 지지는 않아서 점심은 간단히 먹고 시간이 여유로운 우리도 마을 구경을 하기로 했다.
우선 발에 생긴 물집 문제를 해결해야 했으므로 약국을 찾아갔다.


약국에 가기 위해 구한 마을 지도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마을 중앙을 가로질러 걸어가게 되어 있다.

물집 잡힌 곳에 붙여두면 물을 빨아들인다는 밴드를 샀다.
발가락에 붙이는 것과 발뒤꿈치나 발바닥에 붙일 수 있는 것을 샀는데, 14유로로 거의 2만원에 가까운 가격이었다.
밥 한끼를 거하게 먹어도 10유로 정도밖에 안하는 산티아고에서 14유로는 거금이다.ㅜㅜ
이 정도면 엄청난 경비가 드는 것이다.
발이 아파 걷는 것도 힘든데 경비까지 많이 든다고 생각하니 이래저래 걱정이 된다.

언제나 같은 속도로 끊임없이 걷는 것만 하다가 마을 구경을 한다고 돌아다녔더니 이건 또 다른 피로감을 주었다.
그래서 저녁도 낮에 갔던 집에서 먹기로 했다.
식당 안에서 한국에서 온 육호수씨를 만났다.
육호수씨는 한국의 전세방의 전세금을 빼서 그 돈이 떨어질 때까지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란다.
여행이 끝나면 경제적으로는 빈털털이가 되겠지만, 지금 자신이 찾고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여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중이었는데 우리에게 방금 자신이 먹은 스프요리가 너무 맛있다며 추천해주고 갔다.

유럽에서 여행하다 보면 탕요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유럽에서는 탕요리가 많지 않기 때문에 겨우 스프를 시켜 먹는 것이 국물 요리의 다다.
그런데 육호수씨가 추천해준 요리는 한국의 육계장 국물같은 맛이 나는 것으로 계란과 버섯이 들어간 탕이었다.


내가 주문한 샐러드 보다 남편이 주문한 탕요리에 '손이가요 손이가 자꾸만 손이가요.'
이름은 잊었지만 너무 맛있었다.
흔히 말해서 뜨뜻한 국물을 먹으면서 시원한 느낌이 드는 그런 스프같은 탕이었다.
이때 이후로 우리는 가끔 스프를 주문해 먹었는데, 영 입맛에 안 맞는 것도 많았지만 가끔 한국의 국물 요리에 버금가는 맛을 내는 스프를 만나기도 했다.


후식으로 시킨 라이스 스프는 세상에서 제일 단 쌀죽이었다.ㅋㅋ

옆 테이블에서 브라질에서 온 엘리오와 로지, 벳토도 함께 식사를 했다.
브라질 분들도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덜 피곤한지 저녁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잔을 들어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건배를 했다.
왁자지껄한 식당에 각양각색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와서 밥을 먹고 있기 때문에 그닥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마치 동네 선술집처럼 흔건히 취해 몇번이나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와인을 마셨는지 모른다.ㅋ
모든 사람들이 점점 걷는 것을 즐기고 있다.
오늘 우리는 "걷기 너무 좋은 날이어서.' 한 마을에서 처음으로 두끼 식사를 했다.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이란 것이 하루종일 걷고 나면 다리가 너무 아파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
날이 너무 더워 일사병으로 쓰러질 것 같다.
수십명이 한방에서 삐꺽거리는 이층침대에서 자느라 푹 자지도 못하고 언제나 선잠을 잔다.
먹은 밥은 걸을 때 에너지로 다 쓰는지 대변도 잘 안나온다.
물을 몇리터를 마셔대는데도 소변도 잘 안본다.
더위에 얼굴도 타고 땀도 엄청 흘린다.
그런데도 아침에 일어나면 힘차게 길을 나선다.
같이 걷는 사람들을 만나면 활기차게 인사한다.
다 걷고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면 세상 힘든 짐을 다 내려놓은 것 같이 몸이 개운해진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을 보면 그곳이 궁금하다.
조금씩 조금씩 아주 느리게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가고 있다는 것이 한발, 한걸음에서 느껴진다.
처음에 걸었던 20킬로는 고통의 길이었는데, 며칠 지나 걷는 20킬로는 상쾌한 산책의 길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산티아고 순례길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우리는.


20킬로를 걸어 힘이 남아도는 오늘, 사람들은 숙소 로비에 옹기종기 모여 기타치고 노래부르며 신나게 논다.

나도 오늘 같은 날은 마음의 여유가 많아 신나게 노는 사람들을 보며 이런 생각들도 한다.
‘음, 이래서 산티아고를 걷나?’
걷기 시작한지 일주일, 요맘때가 산티아고의 진짜 매력을 알기 시작하는 때인 것 같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끝까지 걸어갈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됐다.
중간에 버스를 타고 갈까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게 됐다.
하루하루가 알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어제 벤토사에서 낙오됐던 엘리사가 걷기 좋은 오늘 31킬로를 내리 걸어 우리가 머무는 마을까지 왔다.
엘리사는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걸었는지 자랑하느라, 나는 그렇게 긴 거리를 다 걸어 여기까지 온 것을 축하하느라 둘이 부둥켜 안고 난리난리였다.
산티아고 길에서는 같은 날 걷기를 시작한 사람들끼리 동지애같은 것이 생긴다.
엘리사도 그 동지를 찾아 무리해서 걸어온 것이다.
이런 끈끈한 동지들이 생기는 것도 산티아고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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