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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2017.6.15.(42,416걸음)


오늘은 나헤라에서 산토 도밍고까지 걷는다.
오늘 걸어야 하는 거리는 21킬로밖에 되지 않는다.


전에도 말했듯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걷는 것이다.
보아하니 중간에 엄청난 오르막이 있다.
그래도 거리가 짧으니 크게 겁이 나진 않는다.
게다가 중간에 마을이 두번 나타나니 거기서 밥도 술도 먹으며 쉴 수 있을 것이다.ㅋ

이렇게 적게 걷는 날은 모든 사람들이 아침에 여유를 많이 부린다.
일어나는 시간도 조금 늦어지고 아침을 챙겨 먹고 가는 사람도 많아진다.
숙소 로비에 사람들이 여유롭게 앉아 아침도 먹고 잡담도 하고 짐도 천천히 싼다.


이 아가씨들은 홍콩에서 온 아가씨들인데, 우리처럼 잘 걷지를 못한다.
둘다 얼마나 큰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는지 그날의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아직 어린 아가씨들이라서 배낭여행에 대한 부푼 꿈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배낭에는 주로 먹을 것이 많이 들어 있다.
길에서 만나면 우리에게 먹을 걸 권하기도 하는데 없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숙소에서 밥도 해 먹는데, 남은 식자재까지 배낭에 짊어지고 다니는 억척스러운 아가씨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걸음이 늦기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짐을 싸서 출발준비를 했다.
우리의 출발 준비란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발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것이다.
물집이 얼마나 진정이 되었는지를 보고, 모든 물집 잡힌 곳에 약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여준다.
대부분의 발가락에 물집이 잡혔기 때문에 거의 모든 발가락에 대일밴드를 붙이고, 발뒤꿈치에도 물집이 잡히려고 하는지 전혀 내 살처럼 느껴지지 않으므로 거기에도 대일밴드를 붙인다.
이렇게 대일밴드로 무장을 한 후에 두꺼운 양말을 신고 운동화를 신으면 우리의 출발 준비는 끝이 난다.
마치 의무실에서 응급처치를 받는 것 같은 의식이다.ㅋ
오늘 우리는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것이지만, 숙소에서 틀어준 에어컨 때문에 어제 잘 자서 컨디션은 좋다.


출발하기 전에 찍은 사진. 뭐 밤이래도 믿겠다.ㅋ

새벽 어둠이 걷혔는데도 하늘에 구름이 많아 오늘은 해가 구름 뒤에 숨었다.
게다가 오늘은 바람도 시원하게 많이 불었다.
산티아고를 걷기 시작한 이후 걷기에 가장 좋은 날씨인 것 같다.
이런 날은 지구 끝까지라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꾸 걸으면 단련이 되는가 보다.
발에는 하루하루 물집이 늘어가지만, 다리는 단련이 되는지

21킬로 정도는 마실가는 기분으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는 생각까지 들었다.


발걸음도 가볍게 폴짝폴짝 걷고 있는데, 오늘은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한국에서 온 김경석아저씨이다.
팜플로냐에서 출발하는 첫날 같이 아침 식사를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만나면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나이는 60이 넘으셨다는데, 항상 선발 그룹에 속해 걸으신다.

오늘은 코스가 짧고 쉬워서 아저씨도 쉬엄쉬엄 걸으셔서 다른 날보다 늦게 우리와 만났다.
아저씨는 아침에 언제나 우리보다 늦게 출발하시는데, 오전 중에 우릴 추월해 지나가시고, 항상 우리보다 3시간 정도 일찍 목적지에 도착하신다.
걸음걸이를 봐도 알겠지만, 정말로 가볍게 아주 잘 걸으시는 분이다.

김경석아저씨는 이렇게 잘 걸어서 한국에서 온 젊은 청년들과 속도를 맞춰 함께 걸으신다.
그리고 숙소도 그들과 같은 곳으로 잡고, 같이 장을 봐서 밥도 같이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언제나 12시 이전엔 목적지에 도착하고 코스가 긴 날은 2시쯤 도착한다니, 5시나 6시에 도착하는 우리랑은 비교가 안된다.

아저씨와 함께하는 청년은 네 명이다.
그중 둘은 사촌형제지간이다.
형은 독일에서 바이올린 만드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공석찬이다.
4월에 독일에 있는 바이올린 만드는 학교에 들어갈 것 같다고 했는데, 아마도 합격이 되었는지 그때부터 활동은 하지 않고 있다.
그의 사촌 동생은 권대열이라는 친구인데, 이번이 첫 해외여행이라고 했다.
첫 해외여행을 산티아고 순례길로 택한 것은 형의 권유였다고 하는데, 이때만 해도 매일 형에게 힘들다고 투덜댔었다.
이 두 친구는 중간에 며칠을 빼고는 거의 같은 여정으로 걸어 목적지까지 함께 도착해서 기억에 많이 남는 친구들이다.


이 사진은 허정임씨가 찍어서 우리에게 이 형제를 만나면 전해주라는 사진이다. 이들은 항상 이렇게 밀집모자를 쓰고 다녀서 같이 걷는 사람들에게 '밀짚모자 쓴 형제'로 통했었다.ㅋ 

이 젊은 친구들은 숫기가 없어서인지 오전에 우리를 앞질러 갈 때 그냥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만하고 지나간다.
내가 여러 번 말을 걸어 조금 대화를 해보긴 했지만 우리와 쉽게 친해지지 않는 친구들이었다.

전반적으로 보면 한국 사람들이 사람들을 사귀기를 어려워하는 것 같다.
아마도 ‘나이’라는 것이 장벽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점이 있다.
우선 호칭이 큰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
외국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이름을 교환한다.
그래서 대화할 때 서로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한국사람들은 서로의 이름을 나누는 습관이 잘 되어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호칭 문제가 생기고, 호칭이 애매하니 대화를 하지 않게 되는 듯하다.
매일 같이 다니면서도 젊은 친구들은 김경석 아저씨의 이름을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에게 이름을 묻는 게 한국사람에게는 어색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문화를 갑자기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한번쯤은 생각해볼 문제인 듯하다.
호칭을 이름으로 통일한다면 세대 간의 갈등도 다소 줄어들 거란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은 아침에 숙소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왔는데, 우리는 일찍 나서느라 아침을 못 먹고 첫 마을에서 아침을 먹었다.
남편 발의 물집이 심각하게 많이 생겨서 가지고 간 일회용 밴드가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오늘 도착하는 마을에서는 약국부터 찾아야겠다고 얘기하면서 식당 옆에 있는 가게에서 양말도 샀다.
아무래도 발이 너무 아파서 양말을 두개씩 신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침도 먹고, 발에 밴드도 다시 붙이고, 양말도 사서 더 신고 그러느라고 첫 마을에서 많이 지체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온 루시아와 캐시가 지나가면서 또 우리의 발 안부를 물어준다.

한참을 걷다가 발이 너무 아프다는 남편 때문에 포도밭 모퉁이에 배낭을 놓고 걸터 앉아 쉬고 있는데, 네델란드에서 온 리치아드, 그는 탐 크루즈를 닮았던 리치아드의 아버지라고 한다. 아무튼 리치아드 아저씨도 지나가면서 남편 발의 안부를 묻는다.
아무래도 산티아고에서 우리는 '물집잡힌 부부'로 인식이 되어 있는 듯하다.ㅋ

다리를 절뚝거리는 사람, 물집 때문에 바늘로 물집을 터트리고 밴드를 붙인 사람, 바세린 등 근육 이완제를 덕지덕지 바르며 걷는 사람.
모두 지친 다리를 끌며 걷지만 꾸준히 열심히 걷는다.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꼭 찍고 싶었던 사진을 찍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지평선이 사방 360도로 펼쳐지고, 그 넓은 평야에 꼬불꼬불 산티아고 길이 나 있고, 그 길에 내가 점처럼 찍혀 걷고 있는 그런 사진이다.
지금까지는 걷는 것도 힘들어 사진 한장 찍겠다고 일부러 앞서 가서 서 보는 것조차 하기 싫었다.
하지만 오늘은 날씨가 열일하는 날이라 이런 사진을 찍을 여유도 있었다.


더 작은 점으로...
하지만 이런 사진을 찍고 나면 물집 때문에 어기적어기적 걷는 남편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이런 사진도 안 더운 날이나 찍을 수 있었다.


리는 이렇게 360도로 지평선이 보이는 길을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다시 동영상을 보니 30일간 끝없이 들렸던 저 발소리가 새롭다.
지금도 산티아고를 떠올리면 들리는 듯한 저벅저벅저벅하는 발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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