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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허허벌판을 걷다가 조금 가파른 산을 올라가야 했다.
산티아고 길에서 산은 그리 힘들게 올라가는 코스가 아니다.
대부분 빙글빙글 돌면서 오르막을 오르다보면 어느새 산 정상에 올라가게 길을 조성해 놓았다.


잠깐이지만 이렇게 가파른 곳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10km가 지나면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엄청 열심히 참으며 걸어야 한다.
그래서 작지만 이 고개가 엄청 힘들었다.
요길 오르는데 세번은 바닥에 주저앉아 쉬어야 했으니..

산꼭대기 나무 그늘 아래서 사진 한장을 찍어보니 우리 모습이 매우 재미있었다.
며칠 땡볕을 모자 하나 쓰고 걸었더니 얼굴이 새까맣게 탔다.
외국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의 살성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외국 사람들은 소매 없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걷는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살이 까맣게 타질 않는다.
열심히 썬크림을 발랐겠지만 그래도 빨갛게 타지 까맣게 타진 않는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아무리 썬크림을 발라도 까맣게 탄다.
우리처럼 썬크림 바르기 싫어하는 사람은 더 이상하게 타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오늘부터는 얼굴을 가리고 걷기로 했다.


이렇게 가리면 직사광선을 맞아 따갑진 않지만 조금 더 덥다.
뭐 타고난 살성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그래서 길을 걷다보면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은 우리처럼 긴팔옷, 긴바지를 입고 얼굴도 가리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러고 앉아서 쉬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분이 물병 하나 들고 가벼운 배낭 하나 메고 스틱도 하나만 짚고 지나갔다.
할아버지가 우리의 모습이 재미있으셨는지 앉지도 않고 서서 우리에게 말을 거셨다.
할아버지는 스페인 분이라고 했다.
해마다 산티아고에 와서 걸으신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걷는 게 그리 힘들지 않다고, 매일 걷는 거리도 정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만큼 걷는데, 보통 30킬로 이상씩 걷는다고 하셨다.
가볍게 30km라 대단하시다. 우린 30km 걷는 날은 거의 죽음이었는데..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또 북한 이야기를 하신다.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이란 북한과 맞서고 있는 나라라는 인식이 가장 큰 것 같다.
사실 외신에 한국 뉴스가 나오면 대부분 북한이 핵무기를 계발한다거나, 김정은이 세습을 했다거나, 어디로 미사일을 발사했다거나,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 등이 주로 다뤄진다.
아마도 지금 산티아고를 걷고 있는 한국인이 있다면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이야기만 사람들이 물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이 할아버지도 우리에게 “너희 나라 안전하니?”라고 물으셨을 것이다.
대한민국 자체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분단국으로 위험을 안고 있는 나라로만 알려져 있다는 것이 매우 아쉬웠다.
우리와 한반도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을 하신 할아버지는 그대로 앉지도 않고 계속 걸어가셨다.
쉽게 천천히 걷는 것 같은데, 아주 빨리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그.런.데.
우리가 한참을 쉬다가 다시 걷고 있는데, 어? 할아버지가 뒤에서 다시 오신다.
그리곤 우리와 또 아까와 비슷하게 북한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분명 우리가 쉬고 있을 때 앞서 걸어가셔서 금방 눈에서 사라졌었는데?
남편은 자꾸 우리가 너무 힘들어서 스페인 귀신을 본 거 같다고 한다.
아무리 힘들다고 우리가 귀신을 봤을까?

오후 늦게가 되면 우리 둘이 많이 뒤쳐져서 길에 다른 순례자를 보기 힘들다.
그래서 그 산길에 우리 둘과 할아버지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할아버지에 대해 알려줄 사람은 없다.
우리도 그후 산티아고까지 가는 내내 그 할아버지는 다시 한번도 못 봤다.
아이쿠, 적다보니 쫌 오싹하다.


오늘 걷는데 가장 힘들었던 곳이 벤토사라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이다.
벤토사 다음이 오늘의 목적지인 나헤라이다.
그런데 벤토사에서 나헤라까지가 12킬로나 된다.
우리가 벤토사에 도착한 시간이 벌써 오후 2시였으므로 나머지 12킬로를 가장 힘든 오후에 걸으려면 아마도 우리는 5시가 넘어야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벤토사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고민을 심각하게 했다.
벤토사라는 마을은 스페인 사람들이 휴가를 오는 마을인 듯하다.
여기저기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식당에도 있고, 주변에 있는 숙소에서도 왔다갔다 한다.
사람들이 휴가로 찾는 곳이라면 편의 시설도 잘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여기서 오늘의 순례를 멈추고 숙소를 잡아 쉴까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리 옆 테이블에는 이태리에서 온 엘리사라는 아가씨가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엘리사는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에 확 띄는 사람이었다.
깡마른 몸에 핫팬츠를 입고 상의는 비키니 차림이었으니...
그렇게 파격적으로 입고 엘리사는 혼자 걷고 있는데 그녀도 잘 못 걷는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오후에 우리랑 뒤쳐진 그룹에 속해 함께 걸었었다.
그간 얼굴만 보고 인사만 나눴는데, 심각한 고민 중인 우리가 보기에 엘리사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 통성명도 하고 이야기를 해 보았다.
엘리사 말이 너무 더워서 꼭 죽을 거 같단다. 내 말이..
자기도 아까부터 앉아서 갈지 멈출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우리가 점심을 먹으면서 버스가 있는지도 알아봤는데, 버스는 오전에만 다니고 오후에는 없단다.
그러니 더 가려면 무조건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 발 상태로는 전혀 더 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멈출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더니 힘이 다시 났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걷기로 하고, 엘리사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면서 거기서 멈추기로 했다.


마지막 식수대에서 브라질 분들을 보았다.
이분들도 매우 못 걷는 분들이다.
5시가 넘어서까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서로에게 계속 힘내라고 말하며 걷다가 이제 목적지 마을이 2킬로 정도 남은 곳에서 우리는 통성명을 했다.
며칠 전부터 통성명을 하고 싶었는데, 왠지 브라질 사람들이라 이름도 어려울 것 같고, 기본적으로 영어를 하지 않는 분들이니 대화도 원활하지 않을 것 같아 그저 인삿말만 건네던 사이였다.

상대의 이름을 알아야 그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평소에 생각하는 나는 그들의 이름이 궁금했다.
세분이 항상 같이 다니셔서 그들의 관계도 궁금했다.
그들의 이름은 엘리오, 로지, 벳토였다.
엘리오와 로지는 부부이고, 로지와 벳토는 남매라고 했다.
외국사람들은 서로 이름은 물어도 나이는 묻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도 그들의 나이는 묻지 않았다.
짐작으로 엘리오가 70은 넘었을 듯하고 로지와 벳토도 60은 넘었을 것 같다고만 생각했다.
엘리오와 로지는 산티아고가 이번이 세번째라고 했다. 벳토는 산티아고가 처음이라고 했다.
벳토가 로지를 소개하면서 “그녀의 이름은 로지야. 로즈(장미)라는 아주 예쁜 뜻이 있는 이름이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는 산티아고에서 moon과 may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소개했다. 로지는 우리의 이름을 듣고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했다.

그들은 산티아고를 걷고 포루투갈에 갈 거라고 했다.
브라질 사람들은 포루투갈 말을 쓰기 때문에 그들이 포루투갈에 가는 것은 뭔가 느낌이 다를 듯했다.
엘리오는 영어를 전혀 못하고, 로지와 벳토는 쉬운 영어는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도 한국사람이 하는 영어를 그들이 잘 못알아 들었고, 포루투갈말을 쓰는 사람이 하는 영어를 우리가 잘 못알아 들었다.
하루에 열번도 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하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지고 싶었지만 언어의 장벽이 좀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이날 통성명 후 아주 많이 친해졌다.

장거리를 걷는 날은 매우 지친다.
게다가 오늘 목적지 마을에서는 알베르게가 마을 끝에 있었다.
마을을 거의 벗어났는데도 알베르게가 나오지 않아 이대로 마을 하나를 더 가는 게 아닌가 내심 걱정이 됐는데, 다행히 마을을 거의 벗어날 즈음 알베르게가 있었다.

오늘 묵은 알베르게는 기부로 숙박비를 내는 곳이다.
기부로 숙박비를 받는 곳은 대부분 공립(무니시팔) 알베르게이다.
그간 우리는 사립 알베르게에서만 묵었었는데 오늘 처음 공립 알베르게에서 묵었다. 기부로 운영되는 곳이 시설이 안 좋다는데, 우린 여기서 만족하게 잤다.
어제, 그제 너무 더워 땀을 줄줄 흘리며 잤더니 목덜미에 땀띠가 올라온 것 같다.
근데 여기는 에어컨도 틀어주어 아주 시원했다.


공립 알베르게에 묵으면서 그곳의 시스템도 오늘 처음 제대로 알았다.
산티아고 길 중간에 있는 마을들에는 거의 공립 알베르게가 있다.
가격은 5유로(그 당시 우리돈으로 6,000원) 정도로 거의 일정한데, 사립 알베르게에 비해 반값이다.
그리고 이런 알베르게는 성당에서 운영하거나 봉사자들이 운영하고 있다.
시설은 열악하지만 운영하는 사람들이 매우 친절하다.

우리는 처음 기부로 운영되는 곳을 간 것이라 얼마를 낼지를 많이 고민했다.
왠지 자율로 요금을 받으면 많이 내도 적게 내도 꺼림찍하다.
사립 알베르게에 묵었다면 일인 10유로씩해서 20유로가 들기 때문에 우린 둘이 합해서 15유로를 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들한테 들어보니 좀 많이 낸 것이다.
공립 알베르게가 평균적으로 일인 5유로니까 둘이 합해 10유로만 냈어도 되는 거였다.

그리고 이 마을 공립 알베르게가 불편하다고 평이 나 있다고 해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침대 배치 때문인 것 같다.
보통 다른 알베르게는 침대를 각각 떨어뜨려 놓았는데, 여기는 두개씩 붙혀 놓았다.
그러니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은 낯선 사람과 나란히 자야해서 불편했을 것 같다.
그것 말고는 전혀 불편한 걸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우린 에어컨을 틀어주어 산티아고에 와서 처음으로 밤에 한번도 깨지 않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매우 늦게 도착했지만 공립 알베르게에 숙소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알베르게가 불편하다는 소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숙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때, 좋다 나쁘다라고만 정보를 알려주지 말고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으로 맥주와 파스타, 그리고 야채 빠에야를 먹었다.
저녁을 먹으면 그날 아무리 많이 걸었고 그래서 힘들었어도 피곤이 서서히 풀린다.

쌍둥이형제는 중간 어디서 머무느라 뒤쳐지는지 오늘은 끝까지 못 만났다.
미국인 투덜이 크리스틴도 저녁을 먹을 때 다시 만났는데, 다리가 너무 아프다며 여전히 투덜투덜한다.
우리 발처럼 크리스틴의 발에도 물집이 잡혀 있었다.
미국 유타에서 온 예쁜 커플 폴라와 에릭도 오늘은 매우 힘들었는지 우리 옆 식당에서 저녁 내내 맥주를 엄청나게 마셔댔다.

다들 이렇게 그날의 피로를 풀고 있다.
중간에 멈추거나 밥을 맛있게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떨거나 나름의 방법으로 그날의 피로를 날려버리고 내일 다시 걷는다.

내일은 걸어야 하는 거리가 좀 짧아 쉽다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푹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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