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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2017.6.14(48,623걸음)


알베르게의 방이 크고 그 방에 있는 침대에 사람이 모두 차면 밤새 엄청 덥다.
아마도 사람들의 체온 때문에 더 더워지는 것 같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커다란 방에 백명 정도 되는 사람이 함께 잘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밤새 더워서 잠을 또 설쳤다.

게다가 오늘도 사람들은 5시 전에 하나둘 나가기 시작한다.
5시면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숙소 안은 어둡다.
사람들은 배낭의 짐을 전날 다 챙겨두는 것 같다.
일어나자마자 어둠 속에서 그대로 침낭을 걷고 배낭을 들고 나간다.

마치 좀비같기도 하다.ㅜ

대부분의 사람들은 씻지도 않고, 아침에 화장실에도 들리지 않고 그냥 길을 나선다.
백 명 정도 자는 숙소에 보통은 남녀 통틀어 네개의 샤워장과 네개의 화장실이 있다.
언제나 샤워장이나 화장실이 붐비면 어쩌나 걱정을 하는데, 우린 크게 불편을 겪지 않았다.
오후에는 우리가 늦게 숙소에 도착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샤워를 끝낸 상태라 여유있게 씻을 수 있다.
그리고 아침에는 모두 그냥들 길을 나서기 때문에 화장실에 줄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아마도 계속 시골길이나 허허벌판을 걷기 때문에 길을 걷다가 대충 길을 벗어나서 볼일을 해결하는 것 같다.
주로 한국 사람들만 아침에 씻고 화장실 볼일 보고 출발한다.


내 짐에서 마지막으로 버릴 것을 버렸다.

올 때 입고 온 긴 팔 겉옷과 긴 면바지이다.
집에 갈 때 다시 입을 옷인데, 생각해 보니 굳이 짊어지고 산티아고까지 가지고 갈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한달을 걸은 후 한국에 돌아갈 때는 한국도 매우 더운 시기라 긴 옷을 입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거의 새옷이라 못 버리고 며칠을 그냥 배낭에 넣고 짊어지고 다녔는데 걷는 게 힘드니 짐을 더 줄여야 했다. 그래서 오늘 숙소에 슬그머니 버리고 길을 나섰다.

남편이 자꾸 침낭을 버리자고 한다.
베드버그 때문에 꼭 침낭에서 자야한다고들 하는데, 남편은 베드버그가 없는지 물리지도 않고, 밤에 너무 더워 땀을 뻘뻘 흘리고 자는데 침낭은 아무래도 짐만 되는 거 같다고 했다.

내가 적극 반대했다.
내 침낭까지 남편의 배낭에 넣고 다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나는 언젠가는 만나게 될 그 베드버그에 대한 두려움이 잘 없어지질 않았다.
오기 전에는 전혀 모르는 것이었는데, 길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베드 버그가 아주 지독한 녀석이라고 한다.
한번 물리면 엄청 가렵고, 물린 독이 계속 번지고, 오래 간다고 했다.

긁다가 팔을 잘라버리고 싶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ㅜㅜ

베드버그를 막는 방법은 침낭 안에 들어가 꽁꽁 싸매고 자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발에 물집이 자꾸 생겨 걷는데 너무 힘들어하는 남편한테는 미안했지만 침낭을 버릴 수는 없었다. 절대로!!!


사람들이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우리도 꽤 일찍 숙소에서 나왔다.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묵은 관계로 도시를 벗어는데 아주 오래 걸렸다.
어제 다리가 덜 아팠으면 이런 것도 구경했으려나? 우린 새벽 어스름에 잘 보이지 않는 조각상 앞에서 기념 사진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도 으쌰으쌰 잘 걸어보자구~

이렇게 큰 도시 주변에는 큰 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공원을 지나 걷다보니 시골 살 때는 자주 봤던 청솔모가 있었다.
순례자들이 엄청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길래 우리도 찍어 보았다.


하지만 우린 백조를 보는 것이 더 신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연못이나 호수에서 오리를 본다.
이렇게 백조 가족이 호숫가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이국적이었다.


그리고 이곳 공원의 동물들은 매일 수많은 순례자들이 지나가서인지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공원에서 산책이나 운동을 하는 사람을 청솔모가 따라가기도 하고, 백조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어도 놀라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모든 걸 알고 걷는다.
몇킬로인지, 어디를 거쳐 어디로 가는지,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어디서 묵을지..
우리?
그냥 간다.
가다 묻는다.
"오늘 어디까지 가요?"
그럼 다 알려주니까.ㅋ
아무튼 길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우리와 같이 산티아고에 가고 있으니까.

며칠 지내면서 왠지 정처없이 걷는 것 같아서 오늘부터는 목적지 마을 이름 정도는 알고 출발하기로 했다.
남편은 어제 숙소 찾느라 도착하고도 한참을 걸어서 힘들었던 것 때문에 와이파이 되는 숙소에 있을 때 오늘 저녁에 묵을 숙소 정보를 찾아놓았다.
우리 둘다 조금씩 숙달된 순례자가 되어 가고 있다.


이젠 이런 정보 정도는 챙겨서 걷기로 했다.ㅋ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걷는 것이다.(외쿡 스타일 지도?)

그래서 오늘은 로그로스에서 나헤라로 걷는다는 걸 알고 출발했다.
29킬로나 되는 긴 거리이다.
어제도 걷는데 엄청 힘들었는데,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길다고 하니 살짝 겁도 났다.

산티아고 길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이정표가 다양하게 있다.
보통은 노란 화살표와 조개껍데기 표시, 그리고 이정표에 다음 마을까지의 남은 킬로수가 나온다.
그런데 이 마을은 조개껍데기에 좀더 멋을 부려 그려 놓았다.
왠지 눈이 많이 가는 표시이다.


길을 걷다가 보게 되는 십자가는 왠지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이 사람들이 이 길을 걸을 때는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옛날에는 길도 잘 다듬어져 있지 않아 매우 험난한 산티아고 길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어떻게 걸으면 걷다가 이렇게 운명을 달리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우리가 걷는 거리도 길고 최근 들어 35도가 넘는 나름 이상기온이 계속되고 있다는데, 우리도 운명을 달리할 것 같은 날씨라는 생각도 해본다.

또 길을 걷다보면 사람들이 버리고 간 신발을 자주 보게 된다.
신발 안에 꽃을 꽂아 놓기도 하고, 담벼락이나 나무 가지에 신발 끈으로 묶어 놓기도 하고, 이렇게 뭔가 문구를 써놓기도 한다.
“밑창이 터진 신발은 여기 버리고, 나는 계속 걷는다.”라는 문구가 뭔가 비장함도 느껴진다.


신발을 버리고 비장하게 써놓은 문구를 열심히 읽어본다.

우리도 이제 걸은지 내일이면 일주일이 된다.
발은 점점 아파지고 태양은 점점 강렬해진다.
산티아고까지 다 걸어도 신발 밑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지는 않지만 걸음의 무게로 봐서는 만신창이가 될 것 같다.

발이 아프고 더위에 지칠 때마다 우리가 산티아고까지 걸어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정작 걸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든 한가지 생각에만 집중한다.
어제 만난 친구와 나눈 대화를 되뇌어 보기도 하고, 더위에 지쳤을 때 마신 맥주나 걷다가 허기져 먹던 메뉴를 생각하기도 하고, 걸으면서 보게 되는 스페인 시골 마을의 풍경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하고,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한다.

또 오후가 되면 지친 다리, 아픈 발, 뻐근한 어깨에 온 생각을 집중하기도 한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고, 가는 방향은 언제나 표시되어 있고, 길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어서 일까?
한가지 생각만을 하기 시작하면 아무런 걱정 없이 그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이상한 건 많은 생각을 하지만 흔히 말하는 ‘고민’은 하지 않는다.

그냥 꾸준히, 신발이 닳도록, ‘지금 여기’에 집중하게 되는 게 산티아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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