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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질질 끌며 걷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면서 목적지인 벨로라도에 도착하니 그나마 정신이 차려졌다.
우리는 숙소에 가장 늦게 도착한 사람이었나 보다.
로비에 사람이 없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오늘 우리는 다른 숙소가 아니라 꼭 이 숙소에 머물러야 한다.
오는 길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이 숙소에 있는 레스토랑 음식이 엄청나게 맛이 있다고 했다.
물집 투혼을 벌이며 이 목적지까지 오는데, 우리는 점심도 못 먹었고, 울 뻔했고, 더위에 미칠 뻔했고, 지팡이도 버렸으니까...

어쩌면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해서 숙소에 빈 침대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모든 침대가 다 나갔기 때문에 스텝도 자리를 비운 것일 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우리처럼 늦게 오는 사람이 없어서 스텝이 잠시 자리를 비운 거였지만 아무튼 우리는 스텝이 나타날 때까지 숙소의 안과 밖을 구경했다.
우선 밖에는 힘들게 걸어오는 순례자를 반기는 인형이 하나 서 있는데 사람이랑 똑같아서 볼 때마다 진짜 사람인줄 알고 깜짝깜짝 놀란다.

숙소에 처음 들어가다가도 놀라고, 맥주 마시러 나가다가도 놀라고, 다음날 아침 출발할 때도 놀라고, 아무튼 볼 때마다 놀랬다.

숙소의 안도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다.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2층으로 올라가 보니 거기에 그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아직 시에스터 시간이라 레스토랑은 문을 열지는 않았다.

다시 로비로 내려오니 로비에 레스토랑에서 제공되는 식사의 메뉴판이 커다랗게 플랜카드처럼 걸려 있었다.
우리의 생각은

이 집 진짜 맛집인가봐?ㅋ

였다.
우리는 로비에 있는 메뉴판을 보고 저녁에 먹을 ‘고기’요리를 마음 속으로 정해보았다.
돼지고기, 닭고기, 이름도 재료도 알 수 없는 지금껏 알베르게나 레스토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메뉴들이 즐비해서 상상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대충 뭘 먹을지를 정하고 있는데, 스텝이 나타났다.
너무나 늦게 온 우리를 안타까운 얼굴로 쳐다보며 수고했다고 위로를 하며 좀 높은 층이지만 그래도 빈 침대가 있다고 접수를 받아 주었다.
한 방에 열명 정도 잘 수 있는 작은 방에서 이미 온 사람들은 씻고 잠을 자고 있었다.
우리도 조용히 우선 씻고 아직도 낮잠은 즐기지 않으므로 슈퍼를 찾아 나왔다.
비싼 밴드는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 같아서, 일반 밴드를 사둬야 했기 때문에 발은 너무 아프지만 광장이 있는 중심가로 슈퍼를 찾으러 갔다.

씻고 나오니 정신이 드는지 사진도 좀 찍어 주시고.ㅋ

마을은 크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집안에서 시에스터 시간을 즐기는지 길에는 순례객들만 돌아다닌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마을은 마을 가운데 성당과 광장이 있다.
거기가 그 마을의 중심가이다.
우리처럼 늦게 도착하면 여행자 안내소도 문을 닫았기 때문에 마을 지도를 얻을 수가 없다.
그러면 무조건 광장을 찾으면 된다.
거기에 뭐든 필요한 것이 있다.
거기에 없는 건 그 마을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특히 작은 마을에서는...ㅋ

광장을 둘러싸며 있는 가게들에서 내 놓은 테이블에도 사람은 한명도 없다.
시에스터 시간이 아니면 시끌벅적했을 테이블들인데도...

광장에 갔더니 슈퍼도 있고 이 시간에도 장사를 하는 바가 있었다.
우리 숙소에 있는 레스토랑은 아직 영업 준비도 안하고 있고, 보통은 저녁 식사는 7시가 되어야 먹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점심도 안 먹은 배를 간단하게 맥주로 채우기로 했다.
음료와 술만 파는 바에서는 식사대용이 될 만한 건 안 팔고 안주로 타파스 정도만 팔기 때문에 간단히 안주에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남편은 하루종일 아픈 발 때문에 초췌해졌는데, 나는 여기서 인생 맥주 안주를 찾아 기분이 좋았다.
저녁을 푸짐히 먹을 것이라 맥주만 간단히 한잔 할 생각으로 들린 바에서 꼬치 안주를 시켰다.
이쑤시개에 올리브와 엔쵸비 그리고 매콤한 고추 절임이 꽂아 있다.

사진을 보니 그때의 그 감동이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 츄릅~^^
이 안주는 정말로 몸과 마음을 위로해주는 대박 안주였다.
안주가 너무 맛있고 마음에 들어 우리는 맥주도 한잔씩 더 했다.
이렇게 시원한 맥주를 마실 때에는 아까의 그 고통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일도 생각이 안 난다.ㅋ

저녁 7시부터 밥을 준다고 해서 숙소에서 저녁시간까지 쉬기로 했다.
아직 우리는 시에스터 시간에 낮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그냥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면서 피로를 푼다.
정말로 발가락 끝과 손가락 끝으로 피로가 피융피융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누워있다가 7시가 되자마자 레스토랑으로 갔다.
인근 숙소에 있는 사람들까지 이 시간에 이 레스토랑으로 식사를 하러 온단다.
미국에서 온 투덜이 크리스틴도 다른 숙소에 묵는데 저녁을 먹으러 이곳으로 왔다.
이때 맛있게 먹으라고 간단히 인사를 나눴는데, 나중에 보니 이날 크리스틴을 마지막으로 봤다.
아마도 우리보다 앞서거나 뒤쳐져 걸었을텐데, 그 이후로 한번도 마주치지는 못했다.
나란히 서서 사진 한장 찍어둘껄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브라질 분들은 우리랑 같은 숙소에서 묵고 계셨다.
아침에 전날 묵은 숙소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도 찍었는데, 오늘 걷기가 너무 고생스러웠던 때문인지 마치 며칠만에 만난 것 같이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많아 테이블도 무조건 합석이라 브라질 분들과 합석을 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제일 비싸고 양 많은 고기 요리를 각각 시켰다.
로지가 우리가 시킨 거대한 고기 요리를 보고 엄청 놀란다.
그리고 나오는 음식마다 사진을 찍어대는 것을 보고도 엄청 재미있어 한다.
그리고 모든 요리는 푸짐했고, 맛이 좋은 소문대로 맛집이었다.


미트볼 같은 것도 있고, 에그스크램블도 있고, 샐러드도 있고, 아무튼 가장 푸짐해 보이는 걸로 주문.


커다란 갈비가 통째로 맛있는 소스를 발라 구워졌다.
남편은 오늘 너무 힘들게 걸었기 때문에 뭔가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옆에 있는 로지 접시랑 비교하니 우리 접시는 두배는 크다.
고기와 술, 좋냐? 너무 좋아!^^ 우린 이러면서 먹고 마시고 사진 찍고...ㅋㅋ

오늘 저녁이 즐거웠던 것은 음식이 맛있는 것도 있었지만 브라질 분들과의 합석이 매우 즐거웠던 이유가 크다.
로지는 우리가 물집 때문에 고생한 얘기를 듣고, 자기는 발에 물집이 조그맣게 잡혔다고 하면서, 남자들은 발에 전혀 물집이 안 잡혔다고 했다.
그들은 이번이 세번째 산티아고 길이라 많은 노하우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 날은 어김없이 그들도 그 숙소에 있었다.
그래서 로지가 가지고 있는 여행가이드를 잠깐 봤더니, 간단한 것이었는데 정보가 알차게 들어 있었다.
마을까지의 거리, 그 마을에 있는 편의 시설, 산의 고도, 알베르게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다 나와 있었다.
우리는 그런 가이드북 없이 걷고 있어서 더 힘든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브라질 분들이 주문한 와인 한병, 우리가 주문한 상그릴라 한병, 그리고 옆 테이블에서 준 남은 와인 반병까지 마시면서 맛있고 즐거운 저녁식사 시간을 가졌다.
옆 테이블 분들은 아일랜드에서 오셨는데, 작년에 1/3을 걸었고, 올해 1/3을 걸을 것이고, 내년에 나머지 1/3을 걸을 거라고 하신다.
순례길을 걷다보면 이렇게 이 길을 쪼개서 걷는 분들이 많이 있다.
자기가 낼 수 있는 휴가를 모아서 이 길을 걷고 가는 것이다.
모아놓은 휴가가 한달씩이나 가능하지 않으므로 보통은 이렇게 쪼개서 이 길을 완주한다고 한다.
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가까우니까 그렇게 하는 거 같다.
우리처럼 먼데서 온 사람은 30일 정도를 들여 한번에 완주를 한다.
한국 사람도 그렇고 브라질 사람도 그렇고, 미국이나 나중에 만난 콜롬비아 청년도 그랬다.
산티아고를 걷는 스타일은 이곳에 접근성이 좋은지 안 좋으지에 따라 달라지는 거 같다.

이야기에 한참 열이 오른 벳토가 맥주 한잔 더 하자고 해서 로지와 엘리오는 자러 보내고 셋이서 레스토랑 문닫는 시간까지 대화를 했다.
벳토는 로지와 엘리오의 권유로 산티아고를 왔다.
벳토가 걷는 것을 보면 언제나 깊은 생각에 잠겨 걷고 있다.
어쩔 때는 혼자 앞서 걸어가서 마을에 있는 카페를 다 둘러보고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카페에 앉아 있으면 일행이 와서 합석을 한다.
어쩔 때는 혼자 나무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다가 일행과 떨어져 빠르게 그들을 따라간다.
소설책을 들고 다니며 보는 걸 여러 번 봐서 무슨 책인지 물었다.
그들은 포루투갈말을 쓰는데, 책을 보면서 영어 공부를 한다고 했다.
산티아고를 걷는 게 좋은지를 물었더니, 아직은 모르겠다고 했다.
브라질은 교육이 뒤떨어져 큰 걱정이라고, 법이 무시되고 있어 위험한 나라라고, 휴대폰을 절대로 테이블에 놓을 수 없는 무법천지인 나라라고, 자기는 브라질에 대한 생각을 아주 많이많이 하면서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벳토가 했던 말 중에 가장 인상깊은 것이 있다.
그가 우리에게 브라질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당연히 축구와 삼바춤을 안다고 했다.
하지만 벳토는 슬픈 얼굴로 자기는 브라질 하면 '법이 없음'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어디가서 브라질에 놀러오라고 권할 수 없다고 했다.
벳토는 자기 나라에 대한 걱정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다.
그후 그는 자기가 64살이고, 지금은 은퇴를 했지만 전에 콩을 수출입하는 회사에 다녔다고 하며, 아내와 귀여운 손자의 사진도 보여 주었다.
나라를 걱정할 때보다는 한결 행복해 보였다.
우리도 언젠가는 남미 여행을 해보고 싶은데... 얼른 브라질의 치안이 좋아져 우리도 맘껏 여행하고 벳토의 걱정도 덜어졌으면 좋겠다.

오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눠보니 벳토의 영어 실력이 우리와 비슷한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도 벳토의 이야기를 다 알아듣지 못했고, 벳토도 우리의 이야기를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서로 짧은 영어였지만 마음을 나누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이 길을 걷는 각각의 사람들이 각각의 자기 생각을 열심히 하며 걷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즐거운 대화와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더니 천장을 뚫어 만든 창문이 보인다.
낮에는 이렇게 해가 들이 비치던 창이었는데, 밤이 되니 까만 하늘이 보인다.
지금 생각같아서는 내일은 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에 가고 싶은데, 여기 마을이 너무 작아 버스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버스가 있는 마을까지는 어쨌든 걸어가야 하므로 발이 아파도 어느 정도는 걸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남편 발 때문에 못 걸을 것 같은데 큰일이다.
하지만 지금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걱정은 내일 일어나서 하기로 하고 우선 눈을 붙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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