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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2017.6.17(47,312걸음)

또다시 새벽에 길을 나서서, 오늘은 벨로라도에서 아게스까지 걸었다.
어제 남편의 발이 극강으로 아팠기 때문에 오늘은 걷다가 큰 마을이 나타나면 버스를 타고 가자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출발 전에 뭔가를 한참을 하고 있던 남편이 이러고 나타났다.

남편 발의 상태가 아주 심각하지만, 황당하기도 했다.

박지성도 아니고 발레리나도 아닌데....

일회용 밴드를 여러 개 붙이고 붕대를 칭칭 감았더니, 남편 발의 상태가 이렇다.
어제 프랑스 분들이 준 붕대로 감았더니 상처가 훨씬 더 편하기는 한데, 신발을 신을 때 압박이 크다고 해서 붕대를 얇게 감아봤단다.
어쨌든 여행은 계속되니 이런 상태로 길을 나섰다.
몇 걸음 걸어보고, 다행히 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고, 쉽게 버스 정류장도 나타나지 않아서, 우선 목적지를 향해 걸어보기로 했다.

길을 나선지 얼마 안되어 아빠와 함께 걷는 어린 아이를 보았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보는 첫 아이였다.
어떻게 이 힘든 길은 저렇게 어린 아이가 걷지?하는 생각에 쫓아가 말을 걸어 보고 싶었다.
아마 우리 발이 가장 아프던 시기가 아니었으면 금방 쫓아가 궁금증을 풀었을텐데, 아무리 열심히 걷는다고 걸어도 그들과의 사이가 좁혀지지가 않았다.
계속 추월하지 못하고 뒤쫓아만 가다가 사연을 묻지도 못하고 멀어질까봐 사진이라도 찍자며 부녀의 사진을 찍었는데, 새벽 노을이 예쁘게 부녀 머리 위로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가 출발한 시간이 이른 새벽이라 우리의 그림자도 마냥 길~~기만하다.

마치 긴 나무다리를 한 삐에로처럼.ㅋ

새벽은 참 걷기 좋은 환경이다.

산티아고를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다.
젊은 청년들도 꽤 많이 있지만 아마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의외로 영어를 자유자재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나라 말을 하지 영어는 잘 못한다.
나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하지만 산티아고에서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산티아고에서는 간단한 영어와 바디랭귀지로도 얼마든지 친구를 사귈 수가 있다.
왜냐하면 산티아고에 간다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고, 매일 열심히 걸어야 한다는 같은 각오를 가지고 있어서 갖게 되는 동질감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를 사귀는데 필요한 영어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Where are you from?”으로 그가 어느 나라사람인지를 알고, "What's your name?”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알면 그 다음부터는 각자가 표현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
혹시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바디랭귀지도 동원하고, 어떤 경우에는 옆에 있는 사람이 도와주기도 한다.
매번 이런 기초 영어로 하루하루 아는 사람을 늘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 어린 순례자 때문에 또다른 기초 영어를 해봤다.
"How old are you?”ㅋㅋ

사실 산티아고에서 친구가 되는 사람들은 서로의 나이를 잘 묻지 않는다.
아마도 외국 사람이 대부분이라 그들의 문화가 반영된 듯하다.
나이를 확인해 서열을 먼저 정하는 한국의 문화와 달리 그들은 거의 나이를 묻지 않는다.
하지만 난 한국사람이라 그런지 그 아이의 나이가 궁금했다.

발이 많이 아팠지만 앞에 가는 아이가 너무 궁금해 열심히 쫓아가다 보니 중간에 나타난 카페에서 잠시 쉴 때 그 아이와 만나 말을 할 수 있었다.

나의 기초영어에 아이의 대답은 9살이라고 했다.
정말로 얼굴을 마주하고 본 아이는 뒤쫓아 올때 보다 훨씬 키도 작고, 마른 체구의 아이였다.
외모도 약간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아마도 엄마가 동양인인가 보다는 생각만 했다.
그리고 다시 쉬운 영어를 동원해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아이가 "소희."라고 답했다.
어? 참 이상한 게 듣는 순간 그게 한국말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너 한국사람이구나?”하고 그냥 한국말로 물었다.
아이가 수줍게 “네.”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한국말로 “한국말 할 줄 알아?”라고 물었더니 옆에 서 있던 아빠가 대신 대답을 했다.
그는 키가 좀 작은 분명한 미국인이었다.
대충 들어보니, 아이가 한국말을 할 줄은 모르지만 한국말을 알아듣기는 한다는 이야기와, 자기가 아빠고 딸과 함께 산티아고를 걷고 있는데 아이가 꽤 잘 걷고 있다는 말이었다.

사실 순간적으로 사연을 알 것 같았고, 그런 복잡한 사연을 영어로 물을 자신이 없어서 그냥 아이에게 멋진 일이다, 대단하다, 아빠랑 재미있게 산티아고를 걷길 바란다라는 말을 한국말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해주었다.
소희라는 아이도 그리고 그의 아빠도 예쁜 미소로 “Thank you.”라고 인사를 하고 카페로 들어갔고, 우린 카페에 들리지 않고 계속 걷기로 했다.

해가 머리 위로 올라가면서 더 더워지고 있었고,

누군가는 이 길에서 여전히 죽어나갔다.

우리가 걸음이 엄청 느린데 그런 우리에게 추월당한 걸 보면 9살 아이에게 산티아고 길은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든 길일 것이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길은 평소 산책을 하거나 여행을 다닐 때 걷는 것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이 걷는다.
아이가 친구들과 동네에서 뛰어놀 때처럼 재미있는 일이 매 순간 일어나지도 않는다.
내 경우를 생각해 보면 어릴 때는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는 방법도 잘 몰랐다.
그러니 스페인의 시골 마을이나 메세타 지역의 평지나 집들의 모습이나 사람들의 표정에 대한 느낌도 소희에게는 크지 않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곳은 9살 또래의 친구가 하나도 없는 곳이다.
어떻게 그들이 가족이 되었고, 아빠는 아이와 왜 산티아고를 걷게 되었는지, 아이는 무슨 느낌을 갖고 있는지 아주 많이 궁금했다.
혹시 다시 만나면 뭐라도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자꾸 뒤돌아 보았다.

소희와 헤어지고 한참을 걷다가 만난 길거리 좌판이다.
시원한 음료와 맛있는 과일이 있고, 음악도 멋지게 틀어놓고, 여기저기 집시 풍으로 꾸며놓은 장식품들도 있었다.
큰 강아지도 한마리 졸고 있다.
판매는 도네이션으로 하고 있었다.
게다가 좌판의 이름은 딱 어울리게 ‘오아시스’였다.
걷는 내내 너무 덥고, 목이 타고, 다리가 아픈 순례객에게 지도에는 없는 이런 좌판은 진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스페인 사람들이 캔에 든 탄산음료를 ‘까사’라고 한다.
시원한 까사레몬을 하나 사 먹으면 갈증도 해소되고, 더위도 가시고, 당분 때문인지 원기도 좀 회복되는 것 같다.
이태리에서 왔다는 청년이 핸드폰으로 비디오를 찍으며 자기만의 산티아고 길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우리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묻고 몇마디 나누는 대화를 동영상으로 찍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해달라고 한다.
아마도 우리가 동양인이니까 다양한 순례객을 담고 싶었던 청년에게 좋은 소재가 됐을 것이다.
신나게 한국말로 인사도 하고 서로 산티아고 길을 걷는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목적지로 생각하고 온 곳은 알베르게도 하나밖에 없고, 알베르게 옆에 바가 하나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다른 가게는 물론이고, 사람이 살 것 같은 집도 슈퍼도 없는 그런 작은 마을이었다.
이런 마을을 ‘까미노 마을’이라고 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한국의 시골처럼 스페인의 시골에서도 점점 집들이 사라지고 있다.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집도 많고, 가끔은 지붕이나 벽이 무너져 폐허처럼 보이는 집도 보인다.
그러다 보니 산티아고 순례객들이 쉴 마을이 없어 계속 더 먼 거리를 걸어야 하니 정부같은데서 지원해 공립 알베르게를 유지하며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알베르게에 묵는 순례객을 위해 카페나 레스토랑 아니면 바라도 하나 옆에 생긴다.
그래서 오로지 산티아고 순례객들을 위해 유지되거나 생겨난 마을을 ‘까미노 마을’이라고 한단다.
여기도 그런 마을이었다.

우선 알베르게에 들려 여분의 침대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의외로 남은 침대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린 바에 앉아 맥주를 한잔하면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우선 오늘 걷는 거리가 짧았고, 어제 발이 정점으로 아프고 나더니 오늘은 어제보다 상태가 눈꼽만큼 나아졌고, 아직 12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염탐해본 알베르게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에서 맥주를 주문하는데, 네델란드에서 온 리치아드 아저씨를 만났다.
우리를 보더니 이 마을에서 묵을 건지를 물으셨다.
생각 중이라고 하니 아저씨는 다음 마을까지 더 걸을 거라고 하셨다.
다음 마을이 3.6킬로만 더 가면 있다고 하시며 거긴 좀더 큰 마을이라고 하셨다.
아마도 아저씨도 여기에는 알베르게 하나, 바 하나 있는 것이 다라는 점이 마음에 안 드신 듯했다.

우리는 이때까지도 아무런 가이드북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리치아드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프린트물을 빌려서 찾아 보니 다음 마을이 얼마 남지 않았고 거기에는 알베르게도 많이 있었다.
생장에서 출발할 때 받은 프린트물이라는데 아주 좋은 정보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맥주를 사들고 파라솔에 앉아 계속 고민을 하고 있는데, 길 건너에 이태리에서 온 엘리사가 있었다.
역시 엘리사도 우리처럼 잘 못 걸으니 우리보다 조금 먼저 이 마을에 도착한 듯하다.
이번엔 내가 먼저 엘리사에게 이 마을에석 묵을 건지를 물었다.
엘리사는 조금 쉬고 다음 마을까지 더 걸어갈 거라고 말했다.

쉴 때는 배낭은 짐짝처럼 방치해 둔다.ㅋ

마을 여건이 그닥 좋지 않으니 당연히 더 걸어야 하겠지만, 어제 우리의 발은 너무 아팠고, 지금 발은 대일밴드와 붕대로 칭칭 감겨 거의 감각이 없는 상태라 고민이 됐다.
하지만 남은 거리가 겨우 3.6킬로라는 말에 천천히 더 걸어 보기로 했다.
도중에 발이 아파 어제처럼 숨 한번 쉬고 한걸음 걷고 숨 한번 쉬고 한걸음 걷고를 반복해도 4시 전에야 들어가겠지 하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오전에 우리를 추월해 갔던 한국 사람들도 다음 마을까지 간다고 하는 것을 들은 터였다.
아마도 하나밖에 없는 알베르게라 시설이 열악해 불편한 게 분명하다고 우리끼리 짐작하고 여기서 푹 쉬고 재충전한 후 천천히 걷기로 했다.

쉽게 결정도 못내리고, 발이 조금이라도 호전될 때까지 쉬다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렇게 오래 쉬고 있는데, 소희가 아빠랑 도착했다.
많이 늦으셨네요라는 내 질문으로 우리의 대화는 또 시작됐다.

아빠의 이름은 제임스라고 했다.
굳이 입양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제임스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가 한국에서 어릴 때 미국에 왔기 때문에 한국말을 거의 잊었다고 한다.
오다가 길에 한국인 누군가가 돌멩이로 ‘덥다’라고 써놓은 걸 사진으로 찍어왔다고 보여주었다.
우리도 봤지만 보는 순간 더 더워지는 거 같아서 그냥 지나쳤는데, 이 아빠는 한국어를 소희에게 읽어주느라고 그걸 찍어온 것이다.
원어민 발음으로 '덥다'라고 잘 읽어 주었다.ㅋ
우리가 제주도에 산다고 하니까 제주도에도 와 봤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해녀도 봤다고 하면서 “제주도에서는 아직도 여자는 물질을 하고, 남자는 집에서 놉니까?”라고 물었다.
왜 외국인에게 제주도의 생활이 그렇게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소희가 잘 걸어주어 자기도 기분이 좋다고 했다.
아침에는 웃으면서 걷다가 힘들어지면 소희의 웃음이 stop한다며 크게 웃었다.
오늘도 소희가 웃음이 멈췄을 때 ‘오아시스’를 만나 거기서 강아지와 한참을 뛰어 놀았다고 그러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 소희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까 우리도 까사레몬을 마셨던 좌판 '오아시스'였다.
그리고 우리가 갔을 때 졸고 있던 커다란 강아지와 소희가 뛰어노는 사진이 있었다.

그들은 소희가 힘들어 해서 이 마을에서 멈춰서 묵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꼭 산티아고까지 소희가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9살 소희는 수줍게 아빠 옆에서 웃으면서 한국말을 하는 우리를 오래오래 쳐다보았다.
아마도 한국말을 쓰는 우리에게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여전히 느리게 느리게 한국말로 소희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한국말을 알아는 듣는다더니 완전 녹초가 되었던 소희가 입가에 작게 미소를 지으며 내 얘기를 들어주어 나도 기분이 참 좋았다.
사진을 찍을 때는 이렇게 환하게까지 웃어주었다.

소희가 걸음이 우리보다 느려 그렇게 헤어진 우리는 산티아고까지 가는 내내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분명히 산티아고까지 걸어왔을 것 같다.
우리는 소희를 만난 후, 발이 아프니 버스를 탈까?하는 생각은 더 없어졌다.
9살짜리도 걷는데, 우리가 못 걸으면 쪽팔리잖아??ㅋㅋㅋ


산티아고 길에서 만나는 흔하디 흔한 성당(ㅋ)도 엄청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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