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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2017.6.25(44,333걸음)

이날 걸음 수는 목적지인 레옹에 도착해 도시 구경을 하느라고 많이 돌아다녀서 만걸음 정도 추가된 수치이다.
이날은 만시나 데 라스 물라스에서 레옹까지 걸었다. 체 20킬로도 안되는 아주 짧은 거리였다.

베드버그 때문에 깜놀해 입던 옷 버리고 새로 장만한 옷이 형광색으로 완전 화려하다.
어제 묵은 숙소가 너무 오래된 건물이라 걱정했는데, 중학생 아이들이 많아 조금 시끄러웠던 것을 제외하고는 잠도 잘 오고 나름 만족스러웠다.
우리가 갈까 했던 다른 숙소에 묵은 브라질 로지아주머니 말이 거기는 매우 별로였단다.
벳토아저씨는 그 숙소에서 베드버그에 물리셨단다.
참... 산티아고 길 내내 숙소는 복불복인가 보다.
어제 우리와 같이 있었던 신혼부부와 옌스도 그 숙소에 묵으며 수영장까지 있다고 자랑했는데, 베드버그에는 괜찮았는지 오늘 길에서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대도시 레옹으로 출발하며 숙소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화려한 복장으로 변신!ㅋㅋ

 

산티아고 길은 총 800킬로로 그걸 다 걸으려면 아무리 걸음이 빨라도 한달이 다 걸린다.
그래서 한달이라는 긴 시간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은 간략하게 레옹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더 바쁜 사람은 산티아고 전 100킬로미터 지점인 사리아에서부터 걷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유입되는 레옹이나 사리아에서는 부쩍 새로운 사람들이 많아진다.
오늘 도착하는 곳이 레옹이라서 그런지 벌써 여기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새롭다.

어제 우리 숙소에서 떠들던 중학생들은 방학을 이용해 이 길을 걷는 것 같다.
아침에 숙소에서 나올 때 보니, 인솔 교사인 것 같은 몇몇 사람들이 큰 들통에 물을 끓여 아이들에게 아침에 차를 타서 나눠주고 있었다.

또 한국사람들은 유럽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껴 보려고 레옹처럼 큰 도시에서는 며칠을 쉬었다 가기도 한단다.
우린 삼년간 유럽을 여행한 경험 때문인지 대도시래도 그닥 끌리는 게 없어서 그런 계획은 없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레옹에 가면,~”

이라면 설레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늘 아침에 사람들의 발걸음은 아주 가볍다.
우리도 이제 발에 난 상처들이 거의 아물어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어둠도 잠시 금방 날이 밝고, 첫마을은 금방 나왔다.
맛있는 커피와 크로와상을 아침으로 먹고 있는데, 카페에 브라질 팀이 들어왔다.
우리가 길을 잃어 이틀만에 다시 재회한 우리는 서로 반가움에 부둥켜 않고 서양식 인사도 나누었다.
이때 로지 아주머니가 자기들이 묵은 숙소를 알려주었고, 거기서 벳토아저씨가 베드버그에 물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이 친구들과 자꾸 헤어지는 것이 일정이 잘 맞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제처럼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길을 다시 또 갈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우선 로지 아주머니가 가지고 다니는 가이드북을 빌렸다.
그리고 핸드폰 카메라에 매일매일의 코스와 거리, 숙소 정보가 있는 그림을 찍어 두었다.

 

이렇게 해두면 우리도 이제는 덜 헤매지 않을까?
로지 아주머니와 엘리오 아저씨는 산티아고 길이 세번째라고 하더니 가이드북에는 도착지 마을에서 묵을 숙소도 형광펜으로 꼼꼼히 표시해두었다.
아마도 그 전에 왔을 때 묵은 숙소인데 좋았던 기억이 있어 이번에도 거기에서 묵을 생각으로 그렇게 하나하나 표시를 해 가지고 오신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만 따라가서 숙소를 정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질 거란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것이 우리가 산티아고를 걸은지 2주만에 처음 얻은 제대로 된 가이드 북이었다.

예상대로 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책자는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책자보다 하루에 몇 킬로씩 더 간다.
진짜로 한국사람보다 그들이 다리가 길어서일까?
아무튼 초반에는 항상 브라질팀과 오후 늦게 같이 목적지에 도착했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나서는 브라질팀이 우리보다 월등히 잘 걸어 오전에 한번 만나면 오후에는 거의 만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브라질팀이 작전을 변경했는지 아침에 매우 일찍 출발해 하루종일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날이 가끔 생기고 있었다.
다행히 요즘 우리도 걸으면 걸을 수록 걷는데 적응이 되어 일찍 출발한 브라질 팀을 따라잡기도 한다.

 

우리의 걸음은 매우 늦지만 지구력은 아마도 산티아고에서 최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발이 나으면서 우리도 걷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한국 젊은 친구들도 거의 우리 뒤로 쳐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오후가 되면 태양이 너무 뜨겁다고 못 걷겠다는데, 우린 작년까지 그 태양 아래서만 일하던 농부였던지라 태양이 덜 무섭다.
산티아고 길은 힘 닿는 데까지 걷는 길이라고 해서 우리는 태양 아래서도 꾸준히 잘 걷고, 이제는 속도도 붙고 여러 모로 걷는 게 재미있어지고 있다.

 

아침을 먹은 마을을 벗어나는데, 마을 끝에 있는 강에서 아저씨가 낚시를 하고 있다.
영화 '가을의 전설'의 브레드 피트는 아니지만 왠지 운치있어 보여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보니 많은 사람들이 걷다가 이 아저씨의 사진을 찍었다며 보여주었다.
모두들 무더위를 참고 힘들게 걷고 있다보니 이렇게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낚시를 즐기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 부러워 보였을까?

 

며칠 전 우리랑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부부와 오늘 서로 통성명을 하고 친구가 되었다.
그때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 서로 눈치껏 "너도 잘 못 걷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눈인사만 했는데, 오늘은 초반부터 우리랑 같이 뒤에 쳐져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우리도 걸음이 꽤 빨라졌는데 이들 부부도 걷는 것이 매우 좋아졌는지 속도가 많이 늦어보이지는 않았다.

 

이들은 몰타에서 온 마리타와 알란이란다.
이태리 남쪽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 산다고 자신들을 소개하길래, 우리도 대한민국 남쪽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 산다고 소개했다.^^
몰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유명한 나라로 알고 있다.
유럽에 있는 나라인데 물가가 그리 높지 않아 유학생도 많이 가고, 지중해에 있는 섬으로 경치가 아름다워 관광으로도 많이 가는 나라로 알고 있다.
게다가 내가 아는 동생이 자기 애들 둘이랑 일년 동안 가서 어학 공부를 했던 곳이라 더 잘 알고 있는 나라였다.

우리가 요즘 되든 안 되든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려고 하는 중이라 이런 이야기까지 하면서 더 친해지려고 했다.
알란의 다리에 물집이 많이 잡혀서 초반에 엄청 힘들게 걸었는데, 이제는 거의 다리가 나아서 잘 걷고 있다고 했다.
알란의 커다란 가방 안에는 먹을 것도 많이 들었다.
아마도 가방이 무거워서 다리가 더 아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가 같이 기념사진을 찍자고 하며 지나가는 벳토 아저씨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으니까 알란이 또 그 큰 배낭에서 셀카봉을 꺼내 그걸로도 다시 한번 찍자고 했다.
사실 우리도 셀카봉을 가지고는 왔는데, 산티아고에서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처음봤다.
다들 멋진 카메라로 사진을 찍거나 간단히 핸드폰으로 찍는데, 셀카봉을 수줍게 꺼내는 알란을 보니 참 소박하고 순진해 보였다.

 

몰타 부부와 사진도 찍고 서로 이 얘기 저 얘기 하느라 늦어진 우리가 서둘러 걷다보니 앞에 브라질팀이 나란히 고개를 넘고 있었다.
자꾸 길을 잃어 우리한테 여러 번 길을 물은 벳토 아저씨, 우리보고 사랑스런 커플이라며 하트를 날려주신 로지 아주머니,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지만 몸으로 반가움과 관심과 기쁨을 표현해주시는 엘리오 아저씨이다.
가장 어린 벳토 아자씨가 64세라니, 그의 누나와 매형인 로지와 엘리오는 더 나이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기색 없이 매일 저렇게 셋이서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는다.

얼마 전 저녁에 술 한잔 같이 하며 우리가 벳토 아저씨에게 “왜 산티아고에 왔는가?”라고 물었었다.
그때만 해도 벳토 아저씨는 “로지와 엘리오가 나에게 추천했다. 그래서 이렇게 그들과 함께 와서 걷고 있는데, 아직은 글쎄..”라고 정확히 답하지 않았었다.
많은 사람들은 산티아고에 무언가를 찾으러 온다고 한다.
참자아를 찾아보겠다는 사람, 삶의 목표를 찾아보겠다는 사람, 자기가 인생에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겠다는 사람 등 다양한 것을 찾고 있다.
아마도 브라질 친구들도 꾸준히 이 길을 걸으며, 꾸준히 서로 대화하며, 꾸준히 무언가를 보며 찾고 싶은 것을 찾고 있을 것이다.

 

한참을 걷다가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어 사진을 찍었다.
건물 전체가 검은 창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가 지나가는데 우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창에 비춰졌다.
우리가 산 옷이 형광색이어서 너무나 눈에 띤다는 것을 이것을 보고 알았다.
우리가 친구를 자주 잃었는데, 우리가 이렇게 선명한 옷을 입고 다니면 친구들이 우리를 잃지 않지 않을까하는 농담을 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우리는 인생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것 같고, 산티아고 길에서도 길을 잃지는 않는 것 같은데, 자꾸 길에서 친구를 잃는다.ㅜㅜ
이제 가이드 북도 입수했으니 다시 친구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은 2017년 6월 10일부터 7월 8일까지 산티아고 길을 걸었던 우리 부부의 찬란한 추억이 담긴 글입니다. 사진은 대부분 남편이 찍었습니다. 글은 제가 썼는데 많이 미숙한 글입니다. 그럼에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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