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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를 나선지 자그마치 세 시간 만에 지나가는 자전거를 봤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부엔 까미노" 하고 엄청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자전거 순례객은 우리와 순례의 리듬이 많이 다르다.
그들은 아마도 이 길이 잘못된 길이더라도 빨리 원래 길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른 길을 알고 있어도 걷는 순례객들은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
순례길을 걷다보면 사람의 속도와 자전거의 속도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걷는 순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가다보면 다음 마을이 나올 것이라고 믿고 열심히 걷는 것밖에는 없다.
한참을 걷다보니 우리보다 앞서간 신혼부부와 옌스는 보이지도 않고, 우리 뒤에 쳐진 미국 할머니도 일부러 사진 찍으며 기다려도 오질 않는다.

 

광활한 스페인 들판에 산티아고 이정표는 아니지만 오늘 왠지 우리는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많이 들어 이런 화살표도 다시 보며 사진을 찍어 보았다.
이대로 길을 잃어서는 안될텐데...

 

11킬로쯤 가서 드디어 마을이 나왔다.
그래 다른 날이랑 좀 다르긴 해도 힘들어 죽겠을 만할 때 어김없이 마을이 나타났다.
그리고 반갑게도 그 마을에서 어제의 7멤버가 다 다시 만났다.
길 잃은 일곱 순례객이지만, 우리끼리 너무 반가워서 한참을 함께 있었는데 사진 한장 찍을 새도 없이 웃고 즐겼다.

 

순례객이 거의 보이지 않는 길을 이들도 걸어오느라 뒤에 우리가 잘 따라오는지 매우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혹시 길을 잘못 들어설까봐 이렇게 귀한 물로 화살표를 만들어 놓았다고 하며 사진을 보여 주었다.
물론 우리는 걸어 오다가 이 화살표를 보았고, 앞서가던 사람 중에서 우리를 위해 표시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신혼부부와 옌스가 도착해 있었고, 한참을 쉬고 있는데 미국 할머니들이 도착한 것이다.
모두들 너무 힘들게 걸어 온데다가 다음 마을이 또 언제 나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완전히 피로가 풀릴 때까지 쉬면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기로 했다.
확실히 우리의 발 상태가 많이 호전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마을에서 먹고 쉰 후, 우리가 7명 중 가장 먼저 다음 마을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름도 어려운 만시나 데 라스 물라스라는 마을은 작은 마을은 아니지만 오래된 마을이다.
좋을 거라 생각했던 초입에 있는 사립 알베르게도 겉모습이 매우 낡았다.
어쩔 수 없이 마을 중간쯤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묵기로 했다.
이 건물도 아주아주아주 오래된 건물이다.
그래도 이 마을에 왔더니 다시 순례객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리는 동떨어진 이상한 길에서 제대로 순례길을 찾아 본류에 합류한 것이다.

 

숙소가 딱히 마음에 안 들어 저녁이나 맛있는 거 먹자며 나와서 야심차게 시킨 빠에야와 크림스파게티는

세상에서 제일 맛이 없었다.ㅜㅜ

빠에야에 들어간 해물은 신선도가 확 떨어지고, 스파게티 면은 불어 터졌다.
뭐든 잘 먹는 남편도 다 못 먹고 남기고, 난 거의 입에도 안댔다. 에잇!
낮에 딱 하나 있던 마을에서 맥주 안주로 먹은 빠에야가 훨씬 맛있었다.

 

오늘은 되는 일이 없으니 일찍 잠이나 자자며 숙소에 자러 들어오는데 프랑스 친구들이 같이 한잔 하잖다.
이미 많이 취했던데, 그래도 잠깐 앉아 맥주 한캔 마시며 이야기했다.
그들은 우리를 벤토사부터 봤단다.
거기면 열흘 전쯤에 지나간 마을인데, 우리는 그들 중 한명 정도만 얼굴이 낯이 익었다.

 

산티아고 길에서는 서양인이 많고, 동양인이 매우 적다.
그래서 동양인이 특이해 사람들이 잘 기억하는 거 같다.(최근에는 한국사람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말이 있다.)
우린 전혀 못 본 것 같은 사람이 우리를 보고 십년지기처럼 반갑게 인사할 때도 있다.

엘리지, 쎄씰, 까미유, 다미앙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프랑스 친구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많은지 많은 것을 물어왔다.
하지만 그중 다미앙이 너무 취해 있어서 했던 말을 자꾸자꾸 하는 바람에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도 어제, 오늘 이상한 길을 계속 걸어온데다 숙소도 그닥 마음에 들지 않고 저녁도 너무 맛없게 먹은 터라 흥이 잘 나지 않았다.

 

옌스의 페이스북을 보니 그들은 처음 우리가 묵으려고 했던 사립 알베르게에 묵었는데, 수영장도 있다고 자랑하며 사진을 올려놓아 기분이 더 착잡했다.
우리도 거기서 묵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게다가 우리 숙소에 어떻게 된 일인지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단체로 묵고 있어서 매우 시끄러웠다.
아마도 아이들이 단체 순례를 하러 온 듯하다.

그래도 내일은 나름 대도시인 레옹에 도착한다.

 

초반에 만났던 허정임씨는 버스 타고 레옹으로 점핑하더니, 벌써 산티아고에 도착했다고 사진을 보내 주었다.
그리고 곧 한국으로 돌아 간다고...
왠지 우리도 도착할 그곳의 사진을 먼저 보니 설레기도 했다.

시작할 때는 길 것만 같던 이 길이 왠지 갑자기 짧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반을 넘게 걸었다.

 

숙소 때문에, 음식 때문에 투덜대지 말자.
한걸음 한걸음을 아끼며 걷자라고 나를 달래며 잠자리에 들었다.

이 글은 2017년 6월 10일부터 7월 8일까지 산티아고 길을 걸었던 우리 부부의 찬란한 추억이 담긴 글입니다. 사진은 대부분 남편이 찍었습니다. 글은 제가 썼는데 많이 미숙한 글입니다. 그럼에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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