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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가 소개해준 ‘사하건’이란 마을은 정말로 꽤 큰 도시였다.

 

마을 입구부터 뭔가 으리으리하다.
버스 정류장도 있다는 정보를 얻어 우리는 아침 먹는 것을 포기하고 먼저 버스정류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순례길을 걸을 때는 적재적소에 길을 안내하는 표시가 있기 때문에 그다지 두리번거릴 일이 없다.
하지만 우리처럼 순례길이 아닌 다른 것을 찾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기 때문에 두리번거리게 된다.
버스정류장 이정표라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다 보니 아웃도어 매장이 보인다.
게다가 이날은 주말도 아니고 평일이어서 문도 열었다.
여기서 옷을 살 수 있다면 굳이 버스를 탈 필요도 없기 때문에 무작정 가게에 들어가 보았다.

 

다행히 적당히 입을 옷이 있어서 두개를 샀다.
겨우 10유로니 우리나라 돈으로 13,000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아웃도어는 엄청 비싸다.
티비에서 선전이라도 하는 매장이라면 여름 옷이라고 해서 윗도리 하나에 5만원에서 10만원은 한다.
샌들도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 사려고 했는데, 실내화를 겸해야 하는 샌들을 찾고 있어서 딱히 적당한 게 없어 사지 않았는데, 가격은 2만원에서 3만원 정도였다.
우리가 산티아고에 가겠다고 산 트레킹화가 25만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여기 물가는 매우 싸다.
우리가 들린 아웃도어 매장도 전문 매장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아웃도어 매장 물건값은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다.
옷에 ‘쿨’ 기능이 있네, 재질이 땀을 식혀주네 하면서 해마다 가격이 오른 탓이다.
신발의 경우도 그렇다.
우리 신발은 운동화 끈이 없다.
와이어에 장치가 달려 있어서 원터치로 신발을 조여주는 기능이 있는 신발이다.
그런데 이 신 기능이 산티아고에서는 매우 불편했다.
우선 꽉 조여주지도 못하지만 자주 땅에 주저앉아 쉬어야 하는데 그 원터치 장치가 책상다리를 했을 때 엄청 베긴다.
게다가 우리가 30일 간을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이 신기능이 장착된 신발은 한국사람이 신은 것 말고는 본 적이 없다.
어떤 이유 때문에 우리나라 장바구니 물가가 높아지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적당한 옷가게도 만나고, 필요한 옷도 사고, 구경도 잘했지만 사진 한장 찍지 않았다.
나는 베드버그에 물린 충격으로 몸과 정신이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은 상태였고, 남편은 갑자기 변경해야 하는 우리의 산티아고 순례길 일정 때문에 생각이 복잡했다.

옷을 샀으니 우린 굳이 버스를 타고 큰 도시로 갈 필요가 없으니 계속 걷기로 했다.

 

옷을 산 후, 여유있게 카페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데, 에릭과 폴라가 우리 앞을 지나 약국엘 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에릭이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약을 사먹으려는 것 같다.
언제나 술을 많이 먹는 그들이니 아마도 술병이 난 듯하다.
왜냐하면 에릭은 난감한 얼굴이고, 폴라는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에릭을 쏘아보며 "에릭이 배가 아파서 약국을 가야해."라고 우리에게 말했기 때문이다.ㅋ

 

아무튼 난 너무 신나게 그들을 불러 세워 “난 옷을 샀으니, 버스를 안 탄다. 너희랑 같이 계속 걸어서 갈 것이다.”라고 주저리 주저리 설명을 하고, 그들은 걷는 걸 포기하지 않아 다행이라며 엄지를 들어올려 보여준다.
이날은 아침부터 영어가 술술 잘 나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우리 상황을 얘기한 터라 걷다가 다시 그들을 만나면 변경된 상황을 또 얘기해야 해서 걷는 내내 머릿 속으로 이런 상황을 설명할 영작을 해보느라 내 머리 속도 바빴다.

 

다시 신나게 걸어서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예쁜 바가 있어서 쉬면서 맥주를 한잔 하기로 했다.

 

우리가 마신 시원한 맥주이다.
사진 찍을 새도 없이 들이켰다.ㅋ
이름은 ‘마오이 레몬’이다.
여러 가지 맥주를 마셔봤는데, 내 입맛에는 이 맥주가 제일 맛있었다.
어떤 맥주는 꼭 안주가 있어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약간 쓴맛이 나는데, 이 맥주는 그냥 탄산음료 마시듯이 마셔도 될 정도로 쓴맛이 전혀 없다.
이날 우리가 이 맥주를 만나고부터는 우리도 여기 사람들처럼 맥주만 시켜서 마실 수 있게 되었다.


태양 아래 허허벌판을 걷다 마시는 맥주는 말로 표현 못하게 시원하고 맛있다.

 

하지만 이 마법처럼 맛있는 맥주가 우리를 마법같은 일로 인도하게 될 줄이야.... 그땐 몰랐다.


이 맥주를 마시기 위해 들린 바에서부터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걸 모르고 우린 그냥 우리 눈에 보이는 화살표만 따라 걸었던 것이다.

 

베드버그에 물려 반바지 하나를 버리는 바람에 교대로 갈아입을 반바지가 하나밖에 없어서 덜마른 빨래를 하루 종일 가방에 메고 다녔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가는 길은 아주 잘 나 있었다.

 

하지만 맥주를 마신 바 이후 14킬로를 걷는 동안 집도 하나 없고, 사람도 아무도 안 지나가고, 순례객도 전혀 안 지나가고, 자전거 순례객 조차도 하나도 없고, 카페도 바도 하나도 없었다.


오후에 걸으면 언제나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이날은 정말로 너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전거 순례객들은 걷는 순례객들과 다른 리듬으로 산티아고 길을 간다.
우리가 자전거 순례객과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들이 왜 다른 스케줄로 산티아고 길을 가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들은 걷는 사람보다 많은 코스를 하루에 간다는 것, 걷는 사람이 한달 걸리는 것을 그들은 2주에서 3주 정도에 끝낸다는 것, 걷는 사람은 100킬로만 걸어도 순례자 증명서를 받는데 그들은 200킬로를 달려야 그걸 받는다는 것 정도이다.


그래서 오후에 걷는 순례객은 거의 없지만 자전거 순례객은 꽤 있는 편인데, 이날은 정말로 한 사람도 지나가질 않는다.
중간중간에 바에 들려 맥주든 음료수든 먹으면 괜찮은데 그것도 없으니 배도 엄청 고팠다.
이럴 때 ‘정보 없이 온 우리’를 탓해 보기도 한다.

 

다행히 중간에 버드나무 숲같은 것이 있었다.
버드나무가 얼마나 큰지 그 그늘이 너무 시원하고 멋스러웠다.
마치 숲속을 헤매다 만난 '시크릿 가든'같다고나 할까?
탁자와 의자까지 나무 그늘에 있어서 우리는 거기서 잠깐 쉬었다.

 

남편은 탁자에 누워 잠깐 잠도 잤다고 한다.
잠깐이지만, 산티아고를 걷고 있는 것도 우리가 어쩌면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더위에 지치고 배가 고프다는 것도 잊은 듯이 편하게 자고 있다.

왜 이렇게 아무 것도 없이 길만 있는지 투덜거렸지만 이렇게 뜻밖에 나타난 나무 그늘이 그 후에도 두고두고 생각이 날 정도로 좋았다.

우리는 계속 그저 우리가 걸음이 느려 뒤쳐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린 항상 그랬으니까.

 

우리는 살면서 마법에 걸리는 순간을 느낄 수 있을까?
이날 우리가 마법에 걸린 순간은 맛있는 마오이 맥주를 마시던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나무 그늘에서 세상 편하게 낮잠을 자던 순간이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도대체 어떤 마법에 걸린 것일까?

그 후로도 한참 후에야 마법인지 동화인지 알 수 없는 마을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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