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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했던 17킬로는 다행히 점심 때쯤 다 걷고 제대로된 카페가 있는 마을에 도착을 했다.
우리가 산 과일에는 스페인에서 처음 보는 납작한 복숭아가 있었다.
아기 엉덩이처럼 봉긋하게 생긴 복숭아를 좋아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품종의 복숭아이다.
다른 때 같으면 카페에서 밥을 먹었을텐데, 오늘은 들고온 짐을 줄어야 하기 때문에 커피만 주문하고 과일로 식사를 대신하기로 했다.

 

이 복숭아는 식감이 아삭아삭하고, 당도가 꽤 높은 복숭아이다.

 

아직 음료수도 남아있고, 에너지바도 있다. 이걸 여기서 안 먹으면 가는 내내 짐이다. 짐..

이 카페에서 미국에서 온 에릭과 폴라를 만났다.
이들도 정해진 목적지 없이 걷는 스타일이라 또 언제 헤어질지 몰라, 이번에는 같이 사진을 찍어 얼굴을 남기기로 했다.

 

에릭은 약간 숫기가 없고, 폴라는 약간 새침한 스타일이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고 항상 둘이서만 다닌다.
내가 자꾸 말을 거니까 우리를 보면 먼저 인사를 건넬 정도까지는 되었지만, 왠지 그들의 영어는 우리가 잘 못 알아들어서 긴 대화는 하지 못한다.
본토 발음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젊은 사람들이라 영어를 엄청 굴리며 해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못 알아 듣겠다.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도 그들끼리 잘 쓰는 말이 있어서 어른들이 잘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으니 아마도 그런 경우인 듯하다.
아무튼 담배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는 이 커플은 17킬로의 끝없는 길을 걷고 여기서 퍼져 술을 마시고 있다.
항상 오전 중에 이들이 우리를 앞서 갔었는데 오늘은 우리가 이들을 앞서갈 것 같다.

 

바 옆 벽에 그려져 있는 순례자 그림이다.
그도 다리가 아픈지 길에 털썩 주저앉아 있다.
이 그림을 보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택시 전화 번호이다.ㅋ
17킬로를 못 걸어 택시를 불러 타고 가는 사람이 꽤 있는가 보다.
아니면 17킬로를 겨우 걷고 숙소까지는 택시로 가든지..

 

이렇게 캠핑카로 스페인을 여행하는 사람도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캠핑카로 다니진 않을 것이다. 날이 더운 여름이 되면서 차츰 스페인 사람들의 휴가철이 다가오는 것 같다.

 

바에서 한참을 쉬고, 원기 회복도 하고 다시 순례길에 나섰다.
여전히 길은 끝이 없지만, 그래도 쉬고 난 후라 잘 걷는다.

 

걷다가 힘들면 이처럼 빈약한 나무 그늘도 반갑다며 작은 그늘 속으로 들어가 쉰다.
어쩌다 보니 너무 작은 나무에 의지해 쉬고 있어서 사진도 찍어 보았다.
그늘만 있으며 시원하니, 나무가 작아도 시원하다.ㅋ

산티아고 길에서 사람들은 돌만 보면 뭐든 만들어 놓는다.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탑도 쌓고, 화살표도 만들어 놓는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돌로 커다란 화살표를 만들어 놓았다.
나도 지나가면서 주변에 있는 돌 하나를 들어 화살표에 보탰다.
어쩌면 저 화살표가 처음부터 저렇게 큰 화살표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 화살표가 길을 꽉 매울 지도 모른다.

이런 화살표는 뜬금없이 있는 게 아니다.
그 쯤에서 길이 약간 헷갈리는 경우에 이렇게 돌로 화살표가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 이 화살표의 시작은 여기서 길을 잘못들어 다른 곳으로 한참을 가다가 되돌아 온 사람이 다른 사람은 힘들게 그러지 말라고 만들었을 확률이 제일 높다.

산티아고를 걷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람이 이 화살표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오늘 우리는 이 이정표에 새삼 놀랬다. 산티아고까지 373킬로 남았다고?
산티아고 길이 800킬로니 우리가 반을 넘게 걸어온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 벌써 이만큼이나 왔다고 생각하니 새삼 놀래서 이정표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동안도 이런 이정표가 가끔 있었다.
600킬로, 500킬로, 400킬로 정도가 남았다는 이정표를 볼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워낙 긴 길을 걷겠다고 작정한 걸음이기 때문에 그런 이정표를 보면

“응, 산티아고는 긴 길이구나.”
“아직 많이 남았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반을 걸었다는 건 느낌이 다르다.
특히나 우리는 800킬로를 걷기만 해서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집에서 나설 때 한번도 완주를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산티아고를 걷는 게 무엇인지 가서 보고 느껴보자는 것이 우리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그 긴 거리의 반을 우리가 걸어낸 것이다.
물집 잡힌 발로 수십 킬로를 걷는 건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고통을 어떻게 참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참아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린 아직도 걷고 있고, 이제 발도 점점 낫고 있어서 걷는 게 쉬워지고 있다.
조금씩 완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고, 꼭 끝까지 걸어가고 싶어졌다.
이 사진은 무심히 찍은 듯하지만 벅찬 감동을 가지고 찍은 사진이다.

오후에는 워낙 더워서 길을 걷다 만나는 바마다 생맥주를 마시게 된다.
이러다 산티아고 길이 맥주로드가 되는 건 아니냐는 농담을 하면서 계속 맥주를 마신다.
그래도 걸으면서 워낙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지 잘 취하지도 않는다.

 

오전부터 계속 우리와 마주친 부부가 같은 바에서 쉬고 있었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는데 그들은 그냥 음료수만 마신다.
바에서 일어나 화살표 반대 방향으로 가길래 내가 “그 길은 잘못된 방향이야. 이쪽으로 가야해.”라고 알려주니까 식수대에 가서 물을 받아가려고 한다고 한다.
맞다, 오후 늦게 느린 걸음으로 걸으려면 물이 많이 필요하다.
우린 어제 산 물과 음료수가 아직도 남아서 식수대를 갈 필요가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오늘 또 하나 알게 되었다.
산티아고 길에서는 물이 없어 고생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카페나 바가 나오면 물을 사던지, 그냥 물을 받아갈 수 있냐고 하면서 물통을 내밀면 받아가게 해주기도 하니 물을 받아 가던지, 아니면 마을마다 있는 식수대에서 물을 받아가면 된다.
물을 양껏 가지고 다니면 오히려 짐이 되어 무거워지고, 물도 시원하지 않다.
이날 1리터 짜리 생수, 1리터 짜리 음료수를 짊어지고 걸으면서 새로 터득한 것은 물통에도 물을 삼분의 일 정도만 받아서 들고 다니자는 거였다.
산티아고 길에서 물은 크게 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물론 먹을 것도 마찬가지이다.
과거 이 순례길에서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구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순례길 중간 중간 딱 목마를 때 목축일 곳이 있고, 딱 배고플 때 배를 채울 곳이 있다

우리의 산티아고 순례길의 노하우가 하나하나 업그레이드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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