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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의 무게를 줄이겠다고 가지고 있는 물병에 물을 반만 채우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을을 벗어나 앞에 나타난 길은 자그마치 16킬로나 곧게 뻗은 길이다.
처음에는 굴곡 없이 쭉쭉 뻗은 이 길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걸을수록 전혀 변화가 없는 이 길이 오히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자갈길이나 흙길이 있는 것보다 더 지루하고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길을 네시간이나 걸었다.
물병에 담아온 물은 겨우 반도 지나지 않아 바닥이 났다.

가지고 온 피규어도 산티아고 순례길에 함께 했음을 인증하려고 이렇게 놓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이 피규어까지 꺼내서 이렇게 사진을 찍은 이유가 있다.
너무나 지루한 이 길에서 뭔가 재미난 것이라도 해야 덜 지루할 것 같았다.

가운데는 아스팔트 길이 곧게 끝이 안 보이게 뻗어 있다.
그리고 그 아스팔트 길 옆으로 그 길 정도 되는 폭으로 흙길이 마찬가지로 끝이 안 보이게 뻗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산티아고 표지석이 서 있다.
옆에 나무도 거의 없어서 그늘이 지지도 않고, 가는 길 내내 집도 하나 없어서 쉬어 갈 수도 없고, 몇 시간째 똑 같은 하늘과 길, 똑같은 표지석을 보며 걷다보니, 덥고 지루하고 꿈 속을 걷는 것 같다.
게다가 오후가 되니 어김없이 같이 걷는 순례자는 눈 씻고 찾아도 없다.
모든 것이 똑같이 계속 반복되고 있어서 우리라도 뭔가 새로운 걸 해야할 것 같아서 가방에서 피규어를 꺼내 사진을 찍어 본 것이다.
피규어가 초점이 잘 안 맞아 30분 이상 여기서 지체한 걸 생각하면 큰 도움은 안 된 것 같기도 하다.ㅜㅜ
어쩌면 이런 똑같은 풍경을 보며 몇 시간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아까 거기서 사람들이 버스를 많이 탄 것도 같다. 어떻게들 다 알고 왔는지…
하지만 우리는 오랜 고민 끝에 산티아고 길을 우리 발로 한걸음 한걸음 다 걷자고 바로 오늘 몇 시간 전에 다짐한 터라 계속 걸었다.

마지막 마을이다.
다음 마을이 목적지인데, 이 마을에는 바도 없이 코카콜라 자판기 하나 있는 것이 다이다.
꼭 이렇게 일이 꼬이는 날이 있다.

오늘은 아침부터 탄산음료를 너무 많이 마셨다.
집에서는 입에도 안대는 탄산음료지만 산티아고길에서는 시원하고 달짝지근해서 쉴 때 마시기 딱이다.
그래서 아침 밥 먹으면서 1리터 짜리를 마시고, 버스 탈지 고민할 때도 얼음 넣어 한잔씩 마셨다.
이렇게 목적지 전 마을까지 왔으면 딱 시원한 생맥주를 한잔할 타이밍인데, 선택의 여지없이 코카콜라 자판기만 덜렁 있는 것이다.

난 그늘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길건너 있는 자판기까지도 못 걸어가고 퍼져 있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 대해 투덜거리면서 그래도 자판기에서 나온 거라 시원하다며 그 자리에서 다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섰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자판기에 산티아고까지 419킬로가 남았다고 써 있다.
반쯤 왔다.ㅜㅜ

길을 나선지 몇 걸음 후, 우리는 우리가 미워졌다.
정보가 없는 우리가 또 헛 고생을 한 것이다.
우리가 앉아 있던 길은 마을 뒷길이었다.
그리고 그 자판기는 카페 뒷문에 비치되어 있던 자판기였다.
길 안쪽으로 카페도 있고, 거기서 더 걸어 들어가면 알베르게도 많고 겉으로 봐도 꽤 큰 마을이 있었다.
그래도 악조건 속에서 쉴 건 다 쉬었고, 길을 벗어나 걸어 들어가는 걸 안하는 우리라 아마도 일찍 알았어도 그 안쪽으로 일부러 걸어가지 않았을 거라는 자기 최면을 걸며 계속 걷기로 했다.

물론 마을을 지나 우리가 걷는 길은 아까와 똑같은 그런 길이었다.
이쯤 되면 징하다.
하필 이렇게 지루한 길을 걷는 날 다른 날보다 많이 걷기로 결심은 해가지고 이 고생인지 하는 생각도 했다.
걷는 중에 4시가 넘었다.
아무리 우리가 늦게 걸어도 4시가 되면 눈 앞에 목적지가 보이는데 오늘은 계속 그 똑같은 길의 끝이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다.

오전 내 걸으면서 카페에게 계속 만났던 일행이 있었다.
커다란 강아지를 데리고 걷고 있는 그 사람들도 사람 때문인지 강아지 때문인지 걸음이 매우 느렸다.
그런데 이 지루한 길을 그들은 오늘 걷지 않기로 한 듯하다.
오후가 된 후부터는 한번도 보질 못했다.
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길이나 뒤로 끝없이 펼쳐진 길에서 같이 걷는 사람이 안 보일 리가 없다.
그러다가 저 뒤에서 두 사람이 걸어오는 걸 보았다.
걸음이 우리보다 매우 빨라 성큼성큼 우리를 쫓아오더니 쌩하고 우리를 앞질러 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사람 중 한 사람은 갓난 아이를 업고 있었다.
배낭 없이 아이만 업은 건 아니고 배낭과 엄마 사이에 아이의 공간이 있어서, 배낭도 메고 아이도 업은 형태였다.
그런데도 우리보다 걸음이 빨라 금방 우리 시야에서 없어졌다.
대단한 순례자란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자전거 순례객이 자전거를 타고 뻥 뚫린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더위와 지루함에 지쳐 있던 터라 그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이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다.
얼마나 반갑던지 냉큼 찻길로 뛰어 올라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에서 온 김미화, 안호근 부부라고 그들이 소개했다.
김미화씨는 자전거를 거의 못타는데 일정 때문에 자전거 순례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유럽 여행을 하는데 산티아고 순례를 하고 다른 유럽 나라에도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하지만 자전거 순례가 갖는 장점이 많아 할 만하다고 했다.

우선 자전거 투어를 하는 회사에서 출발지에 자전거를 가지고 오고, 순례 내내 자전거가 갈 수 있는 도로로만 이동하고, 회사에서 차로 따라다니면서 짐도 옮겨 주고 먹을 것도 챙겨주고 가이드도 해준다고 했다.
숙소도 회사에서 모두 예약을 미리 해주고, 식당도 예약을 해주기 때문에, 무조건 열심히 자전거만 타면 된다고 했다.
이렇게 자전거로 순례를 하는데 기간은 15일이 걸린다고 한다.

오후 내내 덥고 지루했던 이 길을 이 사람들은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길이 너무 좋아서 아침에 싸들고 온 샌드위치도 안 먹고 달리기만 했다며 우리에게 힘들지 않냐고 샌드위치와 에너지바를 나눠주셨다.
초보 실력으로 자전거를 타려니 힘든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쉬려고, 지루한 길을 몇 시간째 걸은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놀려고, 이야기가 아주아주 길어졌다.

그들과 헤어진 후, 우리도 다음에는 자전거로 한번 산티아고 순례를 해보자는 이야기도 했다.
우리는 집에 미니 벨로가 있다.
걷는 순례길을 그대로 따라 자전거를 달리는 사람들은 산악 자전거를 탄다.
그 동안 그것만 봐서 우리 자전거로는 순례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집에 자전거 두고 순례용 자전거를 따로 구할 수도 없고, 게다가 나는 자전거를 잘 못타기 때문에 산악 자전거처럼 큰 자전거는 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만난 사람들은 사이클을 타고 있었다.
사이클로 갈 수 있는 길로만 다닌다고 했는데, 사이클이 다니면 미니 벨로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다음에 우리는 우리 자전거를 가지고 다시 이 길에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길은 끝나게 되어 있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인 마을의 이정표가 나타났다.
저 앞에 집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마을도 꽤 큰 마을이어서 이 이정표가 나오고도 숙소는 쉽게 나와주질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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