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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 평야를 걷다보니 물도 다 떨어졌는데 마을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레스토랑이나 바가 나오면 들어가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던 아니면 물이라도 사 마실텐데 전혀 없고, 마을이 나타나면 분명히 수돗가가 있을텐데 그도 전혀 없었다.
그러다 나타난 작은 성당이 있었다.
무작정 들어간 내게 보인 것은 앞에 있는 제대도 아니고, 서성이다가 우리를 맞아주는 수녀님도 아니었다.
성당 구석에 있는 낧고 오래된 수도꼭지만 보인다.
나는 수녀님에게 “플리즈, 아구아.”라는 정체 모를 말을 했다.
영어도 스페인어도 아닌 말을 하는 내 얼굴을 본 수녀님은 벌써 상황 파악이 다 되셨는지 다 알아 들으신다.
승락의 인자한 미소를 보여주시는 것을 보고 수도꼭지의 물을 받아서 벌컥벌컥 마셨다.

오늘 날씨가 얼마나 뜨거운지 건물 안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도 미지근하다.
물을 한모금 마시니 정신이 들어 성당을 둘러보니 알베르게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것 같다.
한 수녀님이 순례자 두명을 안내해 뒤쪽 다른 문으로 나가고 계셨다.
나중에 남편이 어떤 블로그에서 봤다는데, 이 알베르게가 아주 좋다고 소문이 났나보다.
어쩐지 수녀님도 매우 친절하시고, 분위기도 소담스럽고 아늑해 보였다.
물을 얻어 마실 때는 그 알베르게가 그렇게 소문난 좋은 숙소인 것을 몰라 물 마시고 잠시 성당에서 쉴 수 있었던 것만해도 너무 고마워서 연거푸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산티아고 길 중간중간에 있는 마을에는 그 마을을 아무리 작아도 대부분 알베르게가 있다.
중간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묵는 것은 약간의 모험이 필요하다.
사람이 많이 묵지 않아 조용하고 깨끗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잘 묵지 않기 때문에 시설이 매우 열악한 경우가 있다.
우리도 오늘은 다들 머무는 마을을 지나 다음 마을에 온 것이라 숙소를 정하는데 다른 날 보다 좀더 긴장 되었다.

그 성당을 나서니 곧 우리가 가려던 마을, 베가가 나왔다.
마을에 들어서니 꽤 분주한 레스토랑 겸 바가 있었는데, 알베르게도 겸해서 하는 곳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평점도 꽤 높은 알베르게였다.
그래서 이 곳에서 묵기로 하고 체크인을 했다.

뒤에 있는 바에서 알베르게 체크인도 같이 한다.

씻고 나와 레스토랑에 가서 분위기를 봤더니 평점과 다르게 음식도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고, 맥주도 병맥주만 있고 생맥주가 없었다.
숙소 안에 있는 침대도 과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며칠 동안 우리가 겪어본 경험으로 보면 침대 시트가 흰색인 곳이 깨끗하게 운영되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는 시트도 짙은 파란색이어서 청결 상태를 짐작하기 어렵다.
게다가 샤워장도 큰 방에 겨우 두개밖에 없고 그 샤워장에 화장실이 함께 있어서, 샤워를 하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든 항상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이런 날은 술을 마셔 약간 취해있는 것이 기분 전환에도 좋다.

이곳의 분위기를 말하자면, 우선 카운터에서 손님을 응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할아버지들이시다. 스페인 시골 할아버지들이시니 당연히 영어를 못하신다.
또한 홀에서 써빙을 보고 있는 직원들도 모두 할아버지들이시다. 물론 이분들도 영어를 못하신다.
주변을 둘러보니 동네분들이 손님으로 와서 카드놀이를 하고 계시는데 모두 할아버지들이시다. 너무나 조용히 카드놀이만 하고 계시느라 말이 없지만, 그들도 영어를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우리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은 체크인을 하시는 어눌한 영어 몇마디를 하시는 할아버지가 유일하다.
그렇다보니 평화로운 스페인의 시골 마을에 있는 바에 우리는 이방인처럼 뚝 떨어져 술을 마시고 있는 기분이 든다.
아무래도 마을을 둘러보면서 괜찮은 식당을 찾아 저녁은 먹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마을을 한바퀴 둘러 보기로 했다.
마을이 작아 둘러 보는데 시간이 많이 들지는 않았지만, 괜찮은 식당을 찾는데도 실패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알베르게에 있는 식당에 와서 저녁을 주문했다.
우리보다 먼저 주변에 괜찮은 식당이 있는지 찾아보겠다고 나갔던 미국인들도 돌아와서 우리가 먹는 것을 보고 음식 맛이 어떤지를 묻는다.
웃으면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표현을 했더니 그들도 그냥 우리 옆 테이블에 앉아 저녁을 주문한다.
우리가 음식을 주문했을 때 주방에서 일하시는 분이 음식 접시를 들고 나오는데 그분 역시 할머니이시다. 음식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주시는 것 같은데, 영어를 못하셔서 스페인어로 설명을 해주신다.ㅜㅜ

순례자 메뉴를 주문했더니, 너무 푹 삶아져서 물컹한 파스타와 매일 먹어서 이제는 전혀 색다르지 않는 샐러드에 뜨뜨미지근한 와인 한병이 나왔다.

이 알베르게가 평점이 좋았던 이유는 아마도 가격 때문인 것 같다.
일박을 하는 비용도 사립 알베르게인데 거의 공립 알베르게 가격이었고, 음식도 한 접시에 5유를 넘는 것이 없었다.
저렴한 가격으로 노인분들이 운영하시는 것이니 뭐 딱 집어 불평할 것은 없지만 뭔가 하루의 피로가 덜 풀리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간단히 음식을 먹으며 와인을 한병 다 마셨다.
이런 날은 취해 얼른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이 상책이다.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팀도 밥은 안 먹고 술만 마신다.
이 마을까지 걸어온 사람들은 우리처럼 중간에 딱히 머물고 싶은 괜찮은 마을이 없어서 무리해서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힘이 들어 더는 못 걷겠고, 꽤 큰 마을인데 숙소가 그닥 좋지 않으니 해가 질때까지(이맘때 스페인의 해는 밤 10시에 진다.)여기 마당에 모여 술을 마시는 사람이 꽤 많았다.
아직은 날이 더워 사진 찍을 때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나중에 모든 테이블이 꽉 찼었다.

낮에는 날이 더워 우리가 널어놓은 빨래는 잘 마르고 있는 중이다.
스페인 날씨는 정말로 빨래 말리기에 너무나 좋다.
손빨래로 해서 대충 짜 널어도 한시간 정도면 바삭바삭하게 마른다.
게다가 저녁이 되면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서 빨래가 안 마를래야 안 마를 수가 없다.

오늘 최고로 많이 걸었는데, 최고로 별로인 숙소에 묵게 된 것이다.
그래도 와이파이는 빵빵하게 터진다. 그나마 다행이다.

홍콩에서 온 애미도 우리와 같은 숙소에서 묵었다.
같이 걷던 일랭이 먼저 버스를 타고 앞서나가서 혼자 쓸쓸할 것 같았는데 그 아가씨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떤 미국인 아저씨와 저녁 내내 바 앞에 있는 테이블에서 재밌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홍콩 사람들은 영어를 잘한다.
발음과 억양이 다른 서양인들과는 좀 다르지만, 그래도 일상 생활에서 하는 말에 막힘이 없을 정도로 잘한다.
친구를 사귀는 정도는 하지만, 깊은 대화를 길게 하지 못하는 내 영어 실력으로는 그 홍콩 아가씨가 매우 부러웠다.

이날 칙칙한 알베르게에서 자면서 밤새 베드버그에 물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설쳤다.
다행히 베드버그에 물리진 않았지만, 공포스러운 밤이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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