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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6.20.(50,784걸음)

오늘은 오르니요스에서 베가까지 걸었다.
자그마치 5만 걸음을 넘게 걸었다. 아마 거리로 하면 30킬로가 거의 될 것이다.
오늘 목적지에서 조금 더 걸은 결과이다.

아침에 숙소에서 나오는데, 아침 식사는 제공을 안 한다더니 커피 마실 사람은 도네이션으로 값을 내고 마시고 가라고 해놓았다.
도네이션이라는 것이 사람을 참 난처하게 만들기는 한다.
커피 한잔의 가격이 매우 싼 스페인이기 때문에 작은 동전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공짜로 먹어야 해서 머쓱하다.
커피가 아주 향긋하고 맛이 좋았다.
숙소 주인도 직원도 아무도 없었지만, 새벽에 길을 나서는 순례자들을 위한 그들의 배려가 느껴지는 커피였다.

어제 친구가 된 페르난도와 그의 스페인 친구 고로케(발음은 정확히 이게 아님)와 사진을 찍었다.
페르난도는 어제 침을 맞고 자더니 아침에 컨디션이 아주 좋아보였다.
오늘도 걸을 수 있는 만큼 걷는다고 하는데, 아마도 충분히 다음 목적지까지 걸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로케라는 사람은 이름이 발음하기 매우 어려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한다고 하면서 내가 잘못 발음하는 것을 듣고 괜찮다고 해준다.
페도라 모자를 쓰고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는 고로케를 보면 마치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다.
생긴 것도 멋지고 마음씨도 멋진 사람이었다.^^

우리 등 뒤로 이렇게 해가 떠 오르고 있다.

이렇게 등 뒤에서 뜨는 해는 우리의 긴 그림자를 만들어 주고 있다.
앞에서 걷고 계시는 할아버지는 아마도 이태리 사람인 것 같다.
며칠 전부터 아침마다 우리와 마주치는 분인데, 지나가면서 “차오.”라고 인사를 하신다.
다리도 가냘프신 분이 등산 스틱에 의지해 뒤뚱거리면서 얼마나 열심히 걸으시는지 모른다.
아침에 일찍 보고 나면 우리와 마주치지 않으시는 것을 보면 뒤뚱거리며 걸어도 우리보다 훨씬 걸음이 빠른 걸 알 수 있다.
반바지를 입고 발에 토시를 하셨는데, 더워서 그런지 항상 그 토시를 종아리를 다 드러내고 신발까지 내리고 걸으신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우리 끼리 ‘토시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연세도 있으시니 분명 영어는 못하실 것이다.
항상 보면 열심히 걷기는 하시는데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어울리는 건 거의 보질 못했다.

아침부터 이런 추모비를 보니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한다.
옆에 알베르게 광고 표지판이 서 있는 것은 왠지 얄미워 보이긴 하지만, 아마도 어제 우리보다 더 걸어간 사람들은 지친 상태에서 이 광고판이 엄청 반가웠을 것이다.
왠지 "더 걷다가 골로 가지 말고 우리집에 와서 자고 가시오."라고 하는 것 같기도.ㅋ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멋진 경치도 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우리의 순례길은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점점 해가 높아질수록 우린 점점 지쳐간다.
그래도 오늘은 하늘도 맑고 공기도 맑고 기분도 맑다.

어제 몇몇 사람들은 우리가 머문 마을이 아니라 다음 마을에서 묵겠다고 더 걸었었다.
아침에 걷다보니 그 다음 마을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순례길에서 조금 벗어나 마을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그 마을을 지나쳐 걸어야 했다.
그 마을에서 머문 사람들이 이미 길을 나섰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다음 마을도 그리 멀리 않은 곳에서 나타났다.
이쯤에서 아침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마을을 접어들었다.
마을 입구가 예쁘게 꾸며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아주 작은 성당이 있었다.

덴마크에서 온 애미와 안나마리아는 성지 순례를 하는 마음으로 산티아고를 걷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대부분이 성당은 앞에서 구경만 하고 지나치는데, 그들이 성당 안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고 나오고 있었다.
우리 보고도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하길래, 굳이 사양할 일도 아니라 들어가 보았다.
성당이 얼마나 작은지 그냥 작은 기도실 같이 생겼다.
잠시 묵상하며 즐거운 산티아고 길이 되길 기원했다.

산티아고 길은 처음에 종교적인 이유에서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유럽에 있는 많은 신자들이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성 야고보 성인을 참배하러 각자 자기 집에서 출발해 산티아고까지 걸어서 가던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몇개의 대표적인 순례길이 생기고, 사람들은 그 순례길을 함께 걸으며 산티아고에 간다.

요즘은 종교적인 이유로 오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않는 이유로 오는 사람도 꽤 많은 것 같다. 어쩌면 더 많을지도.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혼자든 함께든 배낭을 메고, 순례길을 걷고, 자전거를 타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잠을 자고 하면서 여행처럼 이 길을 걷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을 감상하기도 하고, 스페인에 젖어 들기도 하고,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여행을 즐긴다.
자전거로 산티아고를 찾은 사람들을 보면 이 길을 달리는 것을 스포츠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몇몇 한국 사람의 경우에는 저렴한 유럽 여행으로 산티아고를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그 어떤 이유든 산티아고는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준다.
그게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를 찾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작은 성당에 들려 기도하며 많은 생각을 하고 나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마을에 들어 섰다.
산티아고를 걸은지 열흘쯤 되니 걷는데에도 약간의 패턴이 생긴다.

난 아침에 출발하면 첫 마을에서 맛있는 스페인 오물렛에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첫번째 행복을 얻는다.
그리고 낮에 더운 길을 걷다가 들른 바에서 시원한 맥주에 올리브와 엔쵸비 절임 타파스를 먹으며 두번째 행복을 얻는다.
그리고 저녁에 목적지에 도달하면 맛있는 저녁과 안식을 줄 숙소에서 세번째 행복을 얻는다.

산티아고에서는 그냥 이렇게 걷기만 해도 하루에 여러 번 소소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오늘의 첫번째 행복한 순간인 아침 식사 시간이다.^^
행복한 아침식사 시간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해가 따뜻하게 비치는 정원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깔끔한 카페에 들어서는데 어딘가에서 “안녕하세요?”라고 누군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넨다.
먼저 와서 아침을 먹고 있는 동양인 부부였다.
난 당연히 아주머니가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기 때문에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말로 “어? 처음 뵙는 분이네요.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 부부는 일본 사람들이었다.
아주머니가 한국에 관심이 많아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우셨다고 한다.
아주 수준급으로 한국말을 구사하고 계셔서 아주 놀랬다.
아주머니의 이름은 게이꼬이고 아저씨의 이름은 다쯔라고 했다.
한국 드라마도 좋아하고 한국 음식도 너무 좋아하신다고, 특히 한국의 삼계탕은 너무 맛있고 특이한 음식이라며 엄지를 연신 올리셨다.
작년에 산티아고를 왔었는데, 걷다가 갑자기 아주머니가 다리가 너무 아파서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 계속 아쉬운 마음도 들고, 다시 오고 싶어서 몸 관리 잘 하시고 있다가 올해 다시 도전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저께 브르고스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고 잘 걷지는 못하지만 이번에는 꼭 산티아고까지 가고 싶다고 하셨다.
우리도 잘 못 걷는다고 하면서 이제 매일 길에서 만날 수 있겠다고 하면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오늘은 한국 청년들과 항상 같이 다니던 김경석 아저씨도 우리와 비슷한 속도로 걸으셨다.
오늘 갈 길이 멀지도 않고, 같이 다니던 청년들이 일부는 마드리드 구경가고, 일부는 하루에 30킬로씩 걷겠다며 앞서가고, 일부는 버스를 타고 갔다고 하시면서 적적하신지 우리와 속도를 맞춰 걸어가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함께 하면서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생장에서 받은 프리트를 빌려 사진을 찍어 두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마을을 모든 정보가 적혀 있는 프린트이다.
우린 이런 것도 없이 지도 하나 보며 걷고 있었으니...
거기에는 각 마을까지의 킬로수, 각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 정보, 그날 그날 걸어야 가야 하는 목적지 등이 잘 나와 있으니 정말 필요한 정보들이었다.
그리고 일본인 부부와 김경석 아저씨까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서는데, 모퉁이를 돌아 있는 카페가 시끌벅적하다.
바로 어제 숙소에서 저녁을 먹으며 수다 폭탄을 퍼부었던 아일랜드 아주머니들이 그 카페에서 우아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계셨다.
그들의 수다는 대단했다.
갑자기 자기들의 이름을 알려주겠다고 하시며, 오늘 걷다가 다시 만나면 그때 자기들 이름을 잘 외우고 있는지 다시 물어보겠다고 하신다.
멋쟁이 미나 아주머니, 우리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던 릴리언 아주머니, 동네 부녀회장같은 앤 아주머니, 시크한 멋을 가진 벌 아주머니, 얌전한 패치 아주머니, 릴리언의 친언니인 진까지 몇 번을 반복해서 자기 소개를 해주었다.
어쩌면 구색이 이렇게 잘 맞는지, 그러니 수다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그 이후에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이렇게 다녀와서도 그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생각날 정도로 열심히 외워두었었는데....
아주머니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오늘 좀 무리를 해서 더 걸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분들은 산티아고에 가지 않으셨을 수도 있다.
작년에 삼분의 일 지점까지 걸었었고, 올해 삼분의 일 지점부터 시작하셨으니 아마도 삼분의 이 지점까지 걸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나 산티아고에 도착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산티아고는 집안 살림을 모두 잊고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그런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같은 아주머니들의 꽃같은 수다를 듣고 우리는 두번째 행복을 찾아 길을 나섰다.

스페인은 밭도 넓어서 스프링쿨러로 밭에 물을 준다.
하늘에서 오는 비로 작물을 기르는 우리나라 농가와 사뭇 다르다.
요즘은 우리 농가도 대규모 농업으로 바뀌면서 이런 곳이 생기고는 있지만, 대부분의 시골 농사는 하늘에 의존해 농사를 짓고 있다.
스페인 시골 농가를 걸을 때 이런 모습을 보면 좀 부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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