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오늘은 적적한 김경석 아저씨가 계속 우리와 속도를 맞춰 걸으셨다.
특히 어제 묵은 공립 알베르게가 너무 불편했다고 오늘부터는 무조건 공립 알베르게에 가지 말고 다른 알베르게의 정보도 탐색해서 편한 곳에 묵어야 겠다고 하신다.
어제밤에도 우리가 묵는 사립 알베르게에 오셔서 시설이 어떤 지 보고 가셨을 정도로 어제 잠자리가 많이 불편하셨던 것 같다.
우리가 그간 사립 알베르게를 위주로 묵었어서 사립 알베르게가 어떤지도 계속 물으셨다.
아마도 청년들과 다닐 때는 그들이 경비 때문에 가격이 싼 공립 알베르게에 묵으니 같이 그곳에서 묵으셨는데, 어제부터 혼자서 걷고 계시니 이제는 편하게 아저씨가 마음에 드는 알베르게에 가서 편하게 묵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다음 마을은 성문을 통과해야 들어가게 되어 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초입에 큰 성당이 하나 있는데, 성당의 이름이 산타 마리아 성당이었다.
팜플로냐에 있는 성당도, 브르고스에 있는 성당도 산타 마리아 성당이었는데, 벌써 같은 이름의 성당을 세번째 본다.
아마도 우리가 관심있게 봤으면 동일한 이름의 성당이 더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 마을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면서 오늘은 아저씨와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게다가 다음 마을이 오늘의 목적지여서 우리의 대화가 더 길어진 것 같다. 여유가 있으니까..

잔 크기에 따른 가격을 적어 놓았는데, 어느 나라 사람이든 잘 알아 볼 수 있게 그림도 같이 그려놓았다.

쉬면서 벗어 놓은 베낭을 보면 함께 쉬고 있는 느낌이 든다.
베낭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 더 힘들지만, 왠지 베낭도 지쳐 보여서 일 것이다.

긴 대화를 끝내고 이제 마지막 힘을 다해 보자. 곧 목적지니까.

멀리서도 꽤나 높아 보이는 산이 평지 가운데 우뚝 서 있다.

요 길을 지날 때는 몰랐는데, 여기서 우리는 엄청나게 잘못된(?) 선택을 했다.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왼쪽으로 가면 신시가지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구시가지였다.
우리는 이 마을의 상징인 멋진 성이 보이는 길인 오른쪽을 선택했다.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보니 왼쪽 길이 탄탄대로인 것이 그리 갔으면 더 좋았을 것을...ㅜㅜ

목적지인 다음 마을의 이정표에는 멋진 성이 그려져 있다. 꽤나 유명한 성인 듯하다.
오른쪽 길로 들어서니 높은 산이 가운데 있고, 그 산 위에 무너진 성같은 것이 있었다.
성이 무너졌지만 무너진 모양 그대로 아주 멋진 성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길을 들어셨다고 생각했었다.

눈앞에 나타난 멋진 성.
김경석 아저씨가 “저 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저 멋진 고성도 구경하고, 360도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이는 아주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답니다.”라고 알려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산 아래서 멋진 성의 모습을 감상하기로 했다.
아무리 유명하고 멋져도 순례길을 벗어나 그것도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은 도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초반부터 우리와 함께 걸었던 후안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스페인 사람이다. 그리고 영어를 한마디로 못한다. 그러나 매우 수다스럽다.
어제 김경석 아저씨가 청년 일행과 떨어져 혼자 알베르게에 묵는데 후안이 같은 방 바로 옆 침대에서 잤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잠자리가 불편했는데, 알아듣지 못하는 후안의 스페인말 수다 때문에 더 힘드셨다고 한다.
후안은 우리를 보고도 스페인말 수다를 엄청나게 퍼붓는다.

오늘도 우리를 앞질러 열심히 걷더니 저 산 아래에서 한참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충 그의 말은 “이 산은 매우 멋지다. 그리고 저 성은 매우 유명한 것이다. 내가 혼자 걷고 있어서 풍경 사진만 찍었는데, 이 성 앞에서는 꼭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 그러니 네가 내 사진을 한장 찍어줘라.”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무너진 성을 배경으로 멋진 독사진을 찍어주니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하고 또 앞서 갔다.
후안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성은 스페인 사람도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어하는 아주 유명한 성이었던 것이다.
이날 우리가 목적지 보다 더 걷는 바람에 이렇게 신나게 우리를 앞질러 가는 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 마을이 목적지이기 때문에 알베르게를 찾아 보아야 한다.
지도 상으로는 매우 큰 도시인데,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도시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은 집도 매우 많고, 심지어 무너진 집도 많이 있었다.
알베르게는 많이 있었지만 왠지 멈추고 싶지 않은 마을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 우리의 잘못된 선택으로 이렇게 된 것이었다.
아까 그 길에서 왼쪽으로 걸어갔으면 거기에는 신시가지가 있고, 좋은 알베르게와 레스토랑 그리고 같이 걷는 친구들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12시 이전이라서 대부분의 알베르게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딱 끌리는 알베르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우리는 처음으로 목적지 보다 더 걸어 가 보기로 했다.
아침에 김경석 아저씨에게 마을 정보가 있는 프린트도 사진으로 찍어 놓았으니 혹시 다른 마을에 간다고 숙소를 못 찾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쯤부터 우리는 산티아고 길에 약간의 자신이 생긴 것도 같았다.

그동안 발이 너무 아파서 정해진 목적지를 지나 더 걷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날은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발도 많이 아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 해보자, 남들도 그런다는데, 우리도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무작정 더 걷기로 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우리는 더 걷기로 한 것을 후회했다.
눈 앞에 높은 산이 보였고, 그 산에는 꼬불꼬불하게 외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앞에 있는 높은 산을 넘어가야 다음 마을이 나타나는 것이다.

산 밑에 주저앉아서 이러고 한참을 발을 주물러 주었다.
물집이 잡힌 발로는 평지를 걷기는 그나마 쉬운데 저렇게 경사가 있는 산을 오르는 건 매우 무리가 가기 때문이다.
약간 긴장은 됐지만, 산티아고 800킬로를 걸으며 우리가 갖고 있는 작은 룰이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되돌아가지 않고 앞으로만 간다. 그러니 가자.

긴 여정에서 길은 각양 각색의 형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 길들은 가보지 않고는 쉬운 길인지 어려운 길인지 알 수 없고, 그 길들은 가보지 않고는 그 길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이런 것에서 약간의 도전 정신도 배우는 것 같다.

무너진 성이 있던 전 마을도 저렇게 높은 산 위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우리 뒤로 그 마을에서 길게 이어진 길이 꼬리처럼 늘어져 있다.
김경석 아저씨 말대로 저 꼭대기에 올라가면 360도 지평선이 보이겠다.
어떻게 보면 제주도에 있는 오름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 저 산만큼 높은 산을 오르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도 360도 지평선이 아주 잘 보인다.
길은 잘못 선택했지만, 지평선을 보겠다고 아저씨가 올라가보라는 산을 올라가보지 않는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여지껏 산티아고 길에서 보지 못한 표지판이 이 산에는 있다.
이 산의 경사가 12도라는 표지판이다.
12도라고 하면 그렇게 가파르지 않은 것 같지만 체감은 거의 45도로 오르는 것 같은 경사였다.

이렇게 땅만 보고 걸으며

걷다가 뒤돌아보면 계속 제자리인 것 같다.ㅜㅜ

이 산에는 나무도 한 그루 없다. 그러니 그늘도 한점 없다.
다행히 바람이 뒤에서 불어주어 지친 우리의 등을 떠밀어 준다.
큰 맘 먹고 오르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수도 없이 뒤돌아 보고, 수도 없이 그늘 하나 없는 길에 주저앉아 쉬어야 했다.
너무 덥고 숨이 차서, 발이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아무나 목적지를 지나 더 걷는 게 아니라는 후회를 끝없이 하며 걸었다.

지금까지의 길 패턴에 따르자면 이렇게 힘든 산을 오르고 나면 그 꼭대기에 오아시스처럼 시원한 음료수와 맛있는 과일을 파는 좌판이 있기 마련인데, 여기에는 그냥 앉아서 쉴 수 있는 쉼터만 만들어 놓았다.
아마도 장사꾼들도 힘들어서 여기까지는 못오는 것 같다.
엄청 힘들게 왔지만 실제 킬로수는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다음 마을까지는 많이 걸어야 한다.
최대한 푹 쉬자는 생각을 하면 쉬고 있었다.

잠깐 쉬고 있는데, 까마득히 뒤에서 쫓아오던 사람이 금방 우리를 따라잡아 정상에 함께 도착했다.

정상에 다 왔다고 기념사진 찍는데, 갑자기 이렇게 뒤에 그가 찍혀서 놀랬다.
우린 헥헥거리고 있는데, 이 냥반은 지친 기색도 없고 쉼터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더니 읽기 시작한다.
하도 궁금해 또 안 되는 영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Do you like book?ㅋ

그리고 긴 대화를 나누며 우린 새로운 친구를 하나 더 사귀게 되었다.

콜롬비아에서 온 환이란 친구이다.
책을 좋아해서 숙소에 비치된 '바꿔보는 책'을 가지고 온단다.
보통 알베르게에 가면 여행자들이 놓고 간 책이 비치되어 있다.
자기가 가지고 온 책을 여행 중 다 읽으면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게 놓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도 다른 사람들이 놓고 간 책 중에서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가지고 가는 것이다.
산티아고에서는 뭐든 짐이 되는 것은 버려야 하는데, 책은 이렇게 활용되고 있다.

환은 한참을 자기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소개를 했다.
나중에 자기가 다 읽고 숙소에 두고 간 것을 보게 되면 우리도 읽어 보라고 했다.
우리가 환에게 어떻게 그렇게 잘 걷는지를 물었다.
분명 우리가 산꼭대기에 거의 도착했을 때 그는 산 아래에서 점처럼 찍혀 산을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긴 콜롬비아에 사는데, 콜롬비아에는 산이 많고 평지가 없어서, 산을 오르는 건 매우 쉽다고 했다.
오히려 평지가 나오면 그 경관이 이국적이고 멋져서 자기는 그걸 구경하느라고 매우 천천히 걷는다고 했다.
콜롬비아도 한국처럼 스페인에서 매우 먼 나라이기 때문에 산티아고가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이번에 생장부터 산티아고까지 완주를 할 것이란 얘기도 했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지 커다란 사진기도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우린 이제야 숨이 제대로 돌아와 기념 사진도 찍었다.
저 천장에 있는 나무들에는 각 나라의 말로 '이 산을 오르다 죽을 뻔했다'는 내용이 빼곡히 낙서되어 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다시 길에서 만나자고 작별인사를 하고 우리는 먼저 출발하겠다고 했다.
환은 한두 챕터 더 읽고 가겠다며 남았다. 참 멋진 친구다.

환과 헤어지고 산을 내려오며 내려다본 풍경이다.
펼쳐진 평야가 마치 구글지도 같다.
우리가 구글지도를 보면 화면에 길만 여러 모양으로 나 있는데, 우리 눈에 들어 온 평지에는 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대분의 사람들이 전 마을에서 오늘의 걸음을 멈춘 것 같다. 그러니까 제대로 왼쪽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말이다.
이렇게나 넓게 펼쳐진 땅에 이렇게나 길고 긴 길에 사람이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예상보다 다음 마을이 너무 안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마을 이정표가 나왔다.
근데 이 마을도 오늘 첫 마을처럼 산티아고 길에서 벗어나 1킬로를 걸어가야 있다고 한다.
벌판에 마을이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이런 이정표는 우리를 매우 갈등하게 한다.
1킬로를 수고스럽게 걸어가면 오늘의 피곤을 풀 수는 있지만, 내일 다시 그 1킬로를 걸어나와야 순례길에 들어설 수 있다.
아무리 다리가 아파 쉬고 싶어도 이건 끌리는 선택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보이지도 않고 아직 이정표도 나오지 않은 다음 마을을 향해 걷는 수밖에 없다.
이미 한계에 다달은 우린 완전 죽을 맛이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우린 이날 또 잘못된 선택을 한 듯하다.ㅜㅜ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