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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가 넘어서 이제 겨우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오늘은 우리가 가장 늦게까지 걸은 날이 될 것이다.
마을에 다 왔는데 정말로 한발짝도 더 못 걸을 것 같아 마을 초입에서 오늘 묵을 알베르게를 검색하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중심가가 나오고 거기에 알베르게도 있었다.
아직도 걸어야 하는데, 시간은 6시가 되고 있었다.
중심가로 접어들고 있는데 바가 하나 보였다.
그리고 세상에나 거기에 우리가 무리해서 쫓아온 동지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폴라와 에릭이었다.
서로 보고 얼마나 좋아했던지.ㅋ
그들은 우리가 6시까지 34킬로나 걸어서 온 것이 대단하다고, 우리는 다시 너희를 만나서 너무 기쁘다고, 그 와중에 폴라는 자기가 오늘 묵는 알베르게가 너무 좋다고 자랑하고, 마침 우리가 찾아놓은 알베르게도 거기라고 하며, 한참을 격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찾아온 알베르게에는 또다른 동지들이 있었다.
홍콩 아가씨인 애미도 같은 숙소에 있었다.
이상한 것은 어제 우리는 같은 숙소에서 묵었고, 아침에 우리가 닫힌 숙소문을 처음 열고 나왔고, 오는 길은 내내 곧게 뻗은 길이었는데, 우린 애미를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그녀는 우리보다 먼저 숙소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혹시 버스를 타고 왔나?
벌써 도착해 씻고 쉬고 있어서 묻진 못했다.

 

자그마치 12시간은 걸은 것 같다. 그래도 숙소에 도착하니 좋다.^^

가장 반가운 사람들은 브라질 팀이었다.
알베르게 마당에서 만났는데, 그들이나 우리나 완전히 환호성을 지르며 반가워했다.
아마도 그들도 우리가 매우 궁금했었던 것 같다.
우리가 함께 걷는 무리에 합류한 것이 너무 좋았는지 이날부터 이들은 우리에게 격한게 볼뽀뽀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그 인사를 할 수 없는 것이 좀 아쉬웠다.
많은 사람들이 늦게까지 걸어온 우리에게 격려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왠지 뭔가 크게 칭찬받을 일을 해낸 것 같은 벅찬 마음이 생겼다.
산티아고 길은 각자 자기의 길을 걷는 건데 이게 뭘까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알베르게에 늦게 도착해서 오늘 일과를 마무리하기가 벅차다.
도착하자마자 씻고, 빨래를 해 널고, 뒤도 안 돌아보고 바를 찾아 갔다.
이렇게 더위 속에서 힘들게 걸은 날은 배 고픈 것보다 시원한 맥주 마실 생각이 더 간절해 진다.
숙소에서 저렴하고 맛있다는 레스토랑을 소개시켜 주었지만, 우리는 숙소에서 나와 더도 안가고 첫번째에 있는 바에 자리를 잡았다.ㅋ
우선 간단한 안주로 해물 샐러드랑 엔쵸비를 시키고 시원한 맥주부터 마셨다.
그리고 내온 안주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양이 많았다.

 

 

해물 샐러드도 양이 많았지만 엔쵸비가 한 접시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사실 산티아고 길은 스페인을 가로지르는 800킬로나 되는 거리이다.
그러니 각 지방의 음식 문화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다.
초반에는 바에서 엔쵸비를 시키면 꼬치에 겨우 한두개 꽂은 것이 나왔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쯤부터 꼬치에 끼워서 나오는 엔쵸비가 없어진 것 같다.
아무튼 안주가 너무 맛있어서 맥주도 더 마시고 파스타도 한 접시 시켜 먹으며 저녁과 술을 모두 이 집에서 해결했다.
이렇게 무작정 들어간 집에서 맛있게 먹고 나온 날은 그날의 피로가 깔끔하게 풀리는 기분이 든다.

시원한 맥주로 갈증을 풀고 맛있는 음식으로 피로를 풀고 나면 그 때부터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말도 안되게 긴 길어서 오후에 만났던 아이를 업고 걷던 사람들이 우리 앞에서 저녁을 먹고 있다.
많이 지쳤을 때이고 그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지나쳐 가서 얼굴은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갓난 아이를 보고 생각이 났다.
그들은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아기의 이름은 ‘제너쿠이스’라고 했다.
그들은 아기가 그냥 길바닥에서 기어다니며 놀게 두었다.

 

 

손이며 발이며 무릎이며 시커멓게 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만의 육아 방식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오늘 너무 힘들어서 아이를 돌볼 힘이 남아있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기는 내가 “제너쿠이스”라고 이름을 부르면 환하게 웃으며 우리 테이블까지 기어온다.

 

 

뭐 좀 더러워지면 어떻겠어, 실컷 놀고 숙소 가서 깨끗하게 씻으면 되지라고 나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 힘든 순례길을 왜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업고 걷는지를 묻고 싶었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걸은 날은 머릿 속으로 영작도 안 된다.
그래서 그냥 궁금증으로 남기기로.

이렇게 먹고 다시 숙소에 들어오니 이제서야 숙소가 눈에 들어온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이다.

 

 

아까 폴라가 자랑했듯이 침대가 이층 침대가 아니고 단층으로 되어 있는 침대이다.
이층 침대는 아래층에서 자는 사람은 일어나 앉을 수가 없어서, 윗층에서 자는 사람은 매번 흔들거리는 사다리를 올라다녀야 해서 매우 불편하다.
하지만 이 알베르게는 단층 침대를 널찍하게 공간도 확보해 주면서 배치해 놓았다.
일층에는 정원과 빨래장이 있고 넓은 주방이 있다. 주방 도구도 다양하게 잘 갖추어져 있어서 밥을 해 먹는 사람들도 매우 편리하게 되어 있었다.
이층에는 침실이 있고 샤워장과 화장실이 있는데, 샤워장과 화장실이 매우 넓고 많이 있어 편리했다.
이층에도 간이 부엌이 있어 냉장고에 물을 시원하게 보관할 수 있게 해 두었다.
이렇게 좋은 숙소가 단돈 5유로, 그러니까 한국 돈으로 6,500원이다.

 

 

오늘은 34킬로라는 경이적인 거리를 걸었지만 저녁도 맛있게 먹고, 숙소도 깨끗하니 좋고, 게다가 잃어버린 친구들을 모두 찾아서 더욱 좋았다.
우리도 나름 열심히 걸었는데 어떻게 그들과 떨어지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선 외국인이 가지고 있는 일정표랑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일정표가 약간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건 일정표대로 걷는 김경석 아저씨가 우리와 하루 떨어져서 걷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외국인들이 다리가 길어 한국인 보다 약간 앞서 가는 듯도 하다.
걸을 때 보면 외국인들은 성큼성큼 걷는 것 같고, 한국인들은 총총총 걷는 것 같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느리게 걷는 것 같아도 금방 앞서 나간다.

우리는 다리가 짧아서 산티아고길이 더 고되다.

물 2리터짜리를 사서 밤새 마셔대도 갈증이 해소가 안 된다.
오늘은 우리가 너무 오래 먼 길을 걸었다.
그리고 내일 걸을 길은 17킬로 동안 바도 레스토랑도 알베르게도 없다는 정보를 들었다.
숙소 근처 마트에 들려 2리터짜리 물 한병, 2리터짜리 탄산음료 한병, 납작 복숭아, 에너지바 등을 사서 내일을 대비하고 숙소에서 쉬었다.
침대가 꽤 괜찮아보여 오늘은 침낭도 안 쓰고 그냥 시트 위에서 잤다.
다음날 이 숙소를 엄청나게 원망하게 될 것은 꿈에도 모른 체...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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