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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없이 17킬로를 가야한다는 긴장감이 우리에게 힘이 됐을까 꽤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때쯤 차도에 지나가던 차가 한대 서서 아저씨가 우리에게 뭐라고뭐라고 소리를 지른다.
혹시 차가 고장이 나서 우리보고 밀어달라고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 더위에 하루 종일 걸은 우리가 그 차를 밀어줄 힘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차에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아저씨가 우리에게 요구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동영상을 찍고 있으니 걸으면서 자기를 보고 손을 흔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산티아고를 걷는 순례객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던 것 같았다.
우리도 신이 나서 손도 흔들고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도 해 주었다.
아저씨가 고맙다고 하더니 차를 타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우리는 왠지 재미있는 일이라며 한참을 그 아저씨가 왜 우리를 찍었을까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분명히 아저씨는 스페인말을 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보다 산티아고 길을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자기도 언젠가는 이 길을 걸어보고 싶어서였을 지도, 아니면 우리가 동양인이니까 산티아고 길이 이렇게 많은 나라에서 찾는 길이라는 걸 찍고 싶었을 지도, 아니면 우리가 얼굴에 복면을 하고 있어서 희안한 순례자라서 찍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떤 경우든 재미있는 일이란 생각에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는데 엔돌핀이 솟는지 힘이 났다.

 

동영상에 찍히고 조금 걸어가니 마을 입구가 나왔다.
이 마을에는 알베르게가 2개밖에 없다고 한다.
초입에 공립 알베르게가 있고, 마을 중간에 사립 알베르게가 있다는데, 사립 알베르게가 평점이 좋아 우린 거기로 가기로 했다.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는 겉으로 봐도 좀 시설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500미터쯤 더 걸어서 다음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거기는 인원이 다 차서 더이상 손님을 못 받는단다.
처음 있는 일이라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냥 카운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신가봐요. 많이 늦으셨네요.”라는 소리가 들렀다.
여지껏 한번도 만난 적 없는 한국 사람들 일행이 이 숙소에 묵고 있었다.
사정 이야기를 듣더니 500미터 되돌아가면 알베르게가 있다고, 그것 말고는 이 마을에는 알베를게가 없으니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그 알베르게는 마음에 안 들어 패쓰한 상태이고, 산티아고에서는 왠만해서는 되돌아 걷는 일은 안하게 되니 계속 고민을 했다.
숙소 주인은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아줄테니 거기서 자겠느냐고 묻는다.
현재 그 방에 자고 있는 사람도 한국사람이라고 하면서 괜찮다면 매트리스를 깔아주겠다고 한다.
방에까지 가서 눈으로 봤지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할지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아서 우리는 우선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를 시켜 마시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남들은 숙소에서 씻고 이렇게 흥청거리며 술도 마시고 밥도 먹으며 수다를 즐기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와서 걱정을 해준다.
앞으로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서 이런 일이 자주 생길 것이므로 아마도 예약을 하고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승락하면 매트리스를 깔아준다는 방에서 묵으려는 한국사람은 우리가 아는 사람이었다.
김경석 아저씨와 함께 다니던 젊은 사람 중 한사람인 이민성씨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여기서 그방에 비집고 들어가 잔다면 서로에게 불편할 것 같았다.
같은 값을 주고 바닥에서 난민처럼 자는 것도 싫고....

 

그 와중에 맥주는 왜그리 시원하고 안주로 내온 절인 올리브는 왜그리 맛있는지...

아무튼 그냥 다음 마을까지 더 걸어가기로 했다.
한국사람들은 지금도 이미 너무 늦었는데 이 더위에 힘들 것이라고 한다.
“괜찮아요. 우린 항상 늦게까지 걸었어요. 오늘은 힘도 좀 남고요.”라고 말하고, 영어를 잘한다는 한국분(지영씨)께 부탁해 다음 마을 숙소에 예약도 했다.
다음 마을까지 걷겠다며 숙소를 나오는데 한국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인사를 한다.
어제 숙소에서 본 프랑스 젊은 친구들의 얼굴도 보이는데 그들도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그래서 오늘도 예기치 않게 30킬로를 넘게 걸었다.
3일 동안 30킬로 이상씩 걸어 거의 100킬로를 걸은 것이다.

사람들의 걱정을 뒤로 하고 힘차게 길을 나섰다.
그동안 우리 걸음이 느려 이렇게 늦은 시간에도 계속 걸었던 것이 이런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 같다.
어쨌든 산티아고 길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걷는 길이기 때문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길을 걷다보면 여기저기 끝도 없는 해바라기 밭이 보였다.
아직은 심은지 얼마 되지 않아 꽃은 피지 않았는데, 성미 급한 한녀석이 피어 있었다.
저 넓은 밭에 해바라기가 모두 피면 얼마나 예쁠까?
난 유독 해바라기꽃을 좋아한다.
우리의 산티아고 길이 끝나기 전에 꼭 꽃핀 해바라기밭을 보길 기대한다.
상상만 해도 숨막히게 예쁠 것 같다.

 

다음 마을로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행히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주어 시원하기도 하고 걷는 게 수월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숙소에 더 신경써야 할 것 같다.

 

다음 마을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지영씨가 예약해준 숙소는 알베르게 겸 호스텔이었다.
그래도 숙박비는 사립 알베르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이 거의 묵지 않는 마을이라 투숙객도 거의 없어 우리는 저렴한 가격에 우리 둘이만 자는 방을 얻을 수 있었다.
시설도 너무 깨끗하고 방도 거의 호텔같아서 너무 신나서 “우리 계속 이렇게 한 마을 더 와서 묵을까봐.”라고까지 했다.
그리고 여길 와 보니 네델란드에서 온 리치아드 아저씨도 전 마을을 지나 여기서 묵고 있었다.
숙소 주인에게 “이 사람들은 나의 친구들이야.”라며 신나서 소개를 해주었다.
아마도 리치아드 아저씨는 주로 호스텔에서만 묵는 것 같다.
오전에 우리랑 만나면 가끔 “어제 내가 잔 숙소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 방 하나를 나혼자 썼는데, 그래서 아침에 늦잠을 잤어.”라고 얘기를 했었다.
아무래도 호스텔은 가격이 비싸니까 대부분의 순례객들은 알베르게에서 자지 호스텔에서는 잘 자지 않는다.
그러니 이 숙소는 가격은 알베르게 가격에 시설은 호스텔이니 아주 좋은 숙소인 것이다.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오후 내내 강렬한 태양 아래서 걷느라 거의 일사병이라도 걸릴 것 같은 상태여도 멘붕이 오지는 않았다.
발에 물집이 여러 개 잡혀서 어떤 방법으로 걸어도 가시밭을 걷는 것 같은 고통이 있어도 멘붕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난 완전히 멘붕에 빠졌다.
숙소가 너무 좋아서 한참을 호들갑을 떨다가 샤워를 하러 갔는데, 두 팔과 두 다리에 모기에 물린 것 같은 자국이 여러 개 있는 것이다.
모기와 베드버그는 물린 흔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모기는 군데군데 무는데, 베드버그는 벌레가 지나간 흔적대로 여러 군데 물린 흔적이 남아 있다.
이건 분명히 베드버그였다.
아마도 어제 잔 숙소에서 물린 듯하다.

베드버그는 일종의 빈대이다.
처음 이걸 알았을 때는 너무 놀래 가렵지도 않았다.
듣기로는 한번 물리면 그 가려움 때문에 사족을 못 쓴단다.
하지만 시골 생활로 벌레에 단련된 나는 그닥 가렵진 않았다.
모기 물려 가려운 정도의 가려움이었다.
이 정도 가려운 거라면 별거 아니네 하는 안도는 됐지만, 어쨌든 그 유명한 놈에게 나도 물렸다고 생각하니 막 우울해지고 멘붕에 빠져들었다.

저녁에 숙소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는데, 맛도 잘 모르겠고, 괜히 멍해 있다가 와인도 쏟고 막 그랬다.
샤워를 두번씩이나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입던 옷은 다 버리고 싶었다.
베드버그가 옷에 딸려서 옮겨진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버리면 입을 옷이 없으므로 어제 입었던 옷만 비닐 봉지에 꽁꽁 싸서 버려버렸다.
특히 팔에 많이 물려서 내 웃도리는 다 버리고 남편 옷을 입기로 했다.
다행히 오늘 숙소가 호텔같은 시설이라 침낭 없이 잘 수 있어서 침낭도 빨래줄에 내다 널었다. 해가 아직은 뜨거우니까 벌레가 도망가주길 바라면서...

이제 좀 걸을 만해서 끝가지 우리 발로 걸어서 산티아고에 가겠다고 생각한 것이 최근인데 갑자기 난관이 생겼다.
내일 걷다가 버스 정류장이 있으면 버스를 타고 큰 도시로 가서 옷을 새로 사야했기 때문이다.
너무 속상해서 자꾸 눈물이 났다.
사실 우리는 베드버그에 대처하는 법도 잘 모른다.

 

산티아고를 걸으려면 필요한 의약품들이다.
뭐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이보다 많이 필요하지만, 걸어보니 이 정도여도 충분한 것 같다.
이런 우리의 의약품 중에도 베드버그에 필요한 약은 하나도 없다.

저녁 내내 인터넷에서 베드버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정보를 찾아보면 볼수록 베드버그의 공포는 더 심해졌다.
다행히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가렵지는 않았다.
내 체질을 믿고 오늘은 우선 자기로 했다. 그래도 밤새 베드버그에 물린 게 너무 억울해서 잠을 설쳤고, 멘붕으로 눈물도 자꾸 나고 그랬다.

아무 대책 없이 산티아고에 무턱대고 와서 하루 걸어보고 상상초월로 아픈 다리 때문에 엉엉 울었는데, 베드버그에 물리고 이렇게 또 울게 될 줄이야..ㅜㅜ
난 어려서부터 유명한 울보라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치면 우선 울고 본다.
안절부절 안타까워하는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그래도 난 무조건 울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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