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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2017.6.23(37,005걸음)

오늘은 모라티노스에서 칼자딜라 데 로스 헤르마닐로스(이렇게 긴 이름이라니...)까지 걸었다.

 

어제 전 마을에 숙소가 없어 남들보다 3킬로나 더 걸어와서 얻은 숙소는 매우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어제 저녁에 베드버그 문제로 고민하다가 오늘 버스 정류장을 만나면 버스를 타고 큰 도시로 가기로 이미 결정을 했기 때문에 아침에 늦게까지 잠을 잤다.
아마 숙소가 편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늦잠을 자려고 해도 그러지 못했을텐데 정말로 편안한 숙소여서 늦게까지 잘 수 있었다.
어제 버스를 타기로 결정하고 방법을 검색해 보니 버스를 타고 이틀치의 거리만 가면 큰 도시인 ‘레옹’이 나온다는 걸 알았다.
레옹을 가기 전에는 그 도시가 얼마나 큰지는 몰랐지만 산티아고를 걷는 사람들에게는 꽤 유명한 도시이다.
깨끗한 곳에서 편안히 자고 나니 베드버그에 물린 우울감도 많이 떨쳐졌다.
사실 우리나라 블로그에 나오는 것처럼 끔찍한 벌레는 아닌 듯하다.
그냥 모기에 물린 정도랄까?(이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내 옷을 다 버린 상태라 옷을 사러 큰 마을엘 가야 했다.

 

늑장을 부리며 씻고 있는데 밖에서 브라질 팀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마을이어서였을까? 어쨌든 로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층 우리 숙소 발코니에 나가 “로지~~”하고 부르니까 그들이 뒤돌아 보았다.
전 마을에서 출발해 한시간 정도 걸었을 거리에서 갑자기 아는 사람이 부르니까 자기들도 반가웠나 보다.
로지와 엘리오는 “너희 여기서 잤냐?” “잘 잤냐?” 그런 인사를 하고, 나는 어제 숙소가 없어서 여기까지 걸어왔다, 곧 출발할 거니 이따가 보자하는 인사를 건넸다.
그들이 격하게 손을 흔들고 계속 걸어가는 것을 보고 돌아서려니까 아랫층에서 또 “하이~”하는 소리가 들린다.
에릭과 폴라가 우리가 묵은 숙소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특히 폴라가 호스텔 겸 알베르게인 우리 숙소가 궁금했는지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다.
값이 얼마인지, 편안한지 등등을 물어서 대화가 길어졌다.
내가 그저께 우리가 같이 묵었던 그 숙소에서 베드버그에 물렸다고 하니까, 폴라 눈이 동그래져서 괜찮냐고 묻는다.
이래저래 얘기가 길어질 거 같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마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말이 되든 안되는 아는 영어 단어 총 동원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기 시작하던 것이.
다른 때는 남편이 어느 정도 영어로 대화가 가능해서 남편한테 의지해서 대화를 했는데, 지금은 나만 있는 상황이고 나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리곤 말도 안되는 영어로 내 수다가 늘어졌다.

그저께 그 숙소가 깨끗하고 관리도 잘 되는 것은 맞지만, 가격이 싸서 오는 사람도 많고 오래된 알베르게라서 아마도 베드버그가 있었던 것 같다.
숙소가 너무 깨끗하니까 침낭에 들어가서 안 자고 그냥 안심하고 침낭을 깔고만 잤더니 자는 동안 베드버그에 물린 것 같다.
사람들이 베드버그에 물리면 엄청 가렵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니 나는 많이 물렸지만 그냥 약간 가려운 정도인데, 낮에는 걷느라 힘들어서 그런지 별로 가려운지도 모르겠고 밤에 잘 때 더우면 좀 가렵더라.
내가 벌레에 물리고 너무 놀래 그날 밤에 입었던 옷을 모두 버렸다.
그래서 옷을 사러 큰도시를 가야할 것 같아서 아마도 오늘은 버스를 타게 될 것 같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남편 옷이다.

이렇게 긴 수다를 내 짧은 영어로 다 말했다니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ㅋ
내 얘기를 다 들은 폴라도 수다가 늘어졌다.

많이 안 가려우니 다행이다.
언제나 숙소에 들어가면 침대와 베개, 시트 등을 잘 살펴야 한다.
만약에 검은 점같은 것이 보이면 그게 베드버그이니 잡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더워도 꼭 침낭 안에 들어가서 자야 한다.
혹시 베드버그에 물려도 옷을 다 버릴 필요는 없다.
베드버그는 물과 햇빛을 싫어하니까, 입었던 옷은 물에 빨고, 짐은 햇빛에 말리면 된다.

폴라의 이 긴 수다도 거의 다 알아듣고 한참을 둘이 얘기를 했다.
단, 폴라가 자꾸 “sorry, sorry.”하는데 그걸 잘 못 알아들었다.
내가 베드버그에 물렸는데 왜 이 사람이 자꾸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혹시 그저께 만났을 때 자기가 숙소 좋다고 자랑해서 우리가 그 숙소에서 자고 거기서 베드버그에 물렸다고 하니 그러나?
그래도 이 사람이 미안할 건 없는데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남편 말이 “이런.” “세상에.” 뭐 그런 추임새란다.ㅋ
그걸 알고도 그 이후에 폴라가 나한테 자꾸 그 말을 쓸 때마다 헷갈렸다.
내가 버스를 타고 레옹까지 갈 것 같다고 하며 벌레에 물린 것 때문에 기분도 풀겸 거기서 이틀 정도 쉴 거라고까지 얘기하니까, 폴라는 그럼 이틀 후에 다시 만나자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린 진짜로 버스를 탈 생각이었다.

친구의 위로가 도움이 되었는지 숙소를 나서서 걷는데 어제만큼 멘붕이 오지 않았다.
게다가 정말로 낮에는 벌레에 물린 곳이 거의 가렵지 않아 그렇게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돌멩이를 올려 놓은 비석을 보았을 때 나는 그 비석의 주인공을 추모하기 보다는 베드버그에 물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아 돌멩이를 얹었다.

 

마음은 많이 진정이 되었는데, 아무리 걸어도 넓은 들판뿐 버스정류장은 나오지 않았다.
사실 그간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버스 정류장을 본 적은 세번인가밖에 없었고, 버스를 본 적은 딱 한번밖에 없었다.
그러니 우리의 ‘버스정류장을 만나면 버스를 타자’라는 계획은 대책없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사전에 버스가 있는 마을과 그 버스의 노선도 정도는 다 알아보고 오는 것 같다.
우리는 완주를 꼭 생각하고 온 것도 아니면서 걷지 못했을 때의 대책을 아무것도 세우지 않고 온 것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을 준비해서 산티아고를 왔다면 꼭 재미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산티아고 길은 지루하리만치 계속 걸어야 하는 길이다.
그러니 모든 정보를 알고 오면 지루한 걸음만 남는 것이 산티아고 길이 될 것이다.
또한 산티아고 길에 있는 모든 숙소는 베드버그에 노출되어 있다.
아무리 깨끗하게 관리를 해도 전날 온 순례자 몸에 붙어 오늘 퍼질 수 있는 게 베드버그다.
그런데 그 베드버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고 오면 언제 물리려나 하는 불안감과 물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하루도 숙소에서 편히 잘 수 없다.
다 알고 있다고 베드버그가 안 무는 것도 아니니, 물린 다음에 걱정해도 된다.
그러므로 모든 정보를 다 숙지하고 오는 것은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

 

며칠째 아침마다 마주치는 프랑스 할머니이다.
우리가 말을 걸어봤지만 할머니는 영어를 전혀 못하시는 것 같다.
남편이 번역기에서 찾아 "우리 매일 만나네요.”라고 프랑스말을 보여주자 그때서야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신다.
할머니도 참 특이하시다.
프랑스말밖에 할 줄 모르시는데 산티아고에 혼자 오셔서 걷고 있다.
걸음걸이도 얼마나 정돈되어 있는지 힘찬 걸음으로 속도에 흔들림 없이 계속 걸으신다.
배낭도 엄청 크고, 물통은 항상 배낭에 걸쳐 메시고 사진기도 하나 옆에 차고 가다가 사진 찍을 때 아니면 쉬는 것도 거의 보지 못했다.
수줍음이 많으신지 우리가 인사를 며칠째 건넸는데, 오늘 겨우 우리랑 눈을 마주치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 주신 것이다.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는 영어를 거의 못해도 불편하지 않다.
하지만 영어를 할 수 있는 만큼 이 길이 재미있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아침에 내가 폴라랑 왕창 영어로 대화를 한 것을 계기로 내 영어도 확 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5PXZ2aTcxk

 

어제 잘잔 우리의 컨디션이 좋아 브라질팀을 따라 잡았다.
우리가 막 뛰어가서 그들과 나란히 걸으니까 “strong couple”이라며 엄지를 들어올린다.
영어로 말하는 것에 자신감이 생긴 내가 이들에게도 베드버그 얘기와 버스를 탈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려고 하다보니 오늘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난 그동안 이들이 영어를 매우 잘하는 줄 알았다.
처음부터 엘리오는 전혀 영어를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특히 벳토는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적극적으로 얘기를 나눠보니 그들도 영어를 잘 못한다.
특히 내가 정확한 영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얘기를 잘 못알아 듣는다.
벳토가 자꾸 자기는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한다. 난 영어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ㅜㅜ
오히려 로지가 천천히 말하고 모르면 다시 묻고 해서 나랑 의사 소통이 잘 되었다.
내가 그들의 말을 잘 못 알아들은 건 그들이 영어와 포루투갈말을 혼용해 쓰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들도 영어를 잘 못하니까 자꾸 포루투갈말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나도 영어에 자신이 없어 소극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그게 다 영어로 들렸던 것이다.

며칠 전에도 숙소에서 엘리오가 우리에게 뭔가 알려주고 싶어서 한참을 포루투갈말로 얘기를 하다가 로지를 불러와 또 얘기를 해주었는데, 우리가 전혀 못 알아들었었다.
로지는 영어를 좀 하는 줄 알고 있었어서, 그때 우리는 우리의 영어 실력을 한탄했었다.
그 이후 며칠을 그들을 못봐서, 우리는 아마도 그들이 걷는 걸 포기하고 집으로 갔나보다 그래서 그 절절한 사연을 알려주려고 우리가 아무리 못 알아들어도 자꾸자꾸 뭔가를 설명했나보다 했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도 영어를 잘 못하니까 어설픈 영작에 중간중간 포루투갈말도 섞이고 발음도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산티아고 길의 순례자들은 영어권이 아닌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에 영어를 못하는 것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만큼만 들으면 된다.
이후로도 로지는 다음에 우리가 도착할 마을이 크고 아름다운 마을이라며 '다는 못알아 듣겠는 영어'로 한참을 소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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