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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가 뭔가 음식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제주의 역사를 아는 것이 제주의 음식을 아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는 이제 익히 알고 있다.
어렵지만 열심히 들어 보았다.

옛날에 제주도는 유배지로 더 유명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대역죄인으로 찍힌 정치범들을 제주도로 보냈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추사 김정희일 것이다. 그는 조선 1840년 55세의 나이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9년간 체류하였다고 한다.
제주도가 유배지로 적격이었던 이유는 우선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오지라는 것 그리고 제주도 자체가 살기에 척박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은 좀더 잘 살아 보겠다고 제주를 떠나 육지로 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과거 제주도민들은 관리들의 수탈과 왜구의 잦은 침입, 지나친 진상에 의해 행해지는 가혹한 부역이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게다가 척박한 환경이었고, 가끔 큰 흉년이나 전염병이 돌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섬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이렇게 섬을 빠져 나간 사람들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해안을 떠돌아 다니는 유랑민이 되었고 그에 대한 피해도 많았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 제주 도민이 육지로 너무 많이 빠져나가 제주 인구가 5만이 넘지 못했을 정도라고 한다.
참고로 지금은 제주도민이 60만이 넘는다고 하니 그때 얼마나 제주도민이 적었는지 알 수 있겠다.

도민이 줄면 부역을 할 사람이나 세금을 낼 사람이 주는 것이므로 중앙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바로 이때 내려진 것이 '출륙 금지령'이다. 이 출륙 금지령은 1629년(인조 7년)부터 1823년(순조 23년)까지 200년간 국법으로 제주도민이 섬에서 나가는 것을 막는 조치였다.
특히 이때 여자가 육지로 시집가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고 한다.

이런 '출륙 금지령'이 제주도민 생활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 당시 제주도는 탐라국 시대 해상을 왕래하며 무역하느라 발전한 조선술이 뛰어났었다.
쌍돛을 단 대형선박이나 전쟁에 나설 배를 만들어 진상하였을 정도로 제주도의 조선술은 뛰어났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배였을 듯하다.

하지만 출륙 금지령과 함께 중앙에서는 제주도에서 배를 만드는 일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대형선박을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혹시 육지로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이러한 조치로 제주도 어민들은 먼 바다 조업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민어, 조기, 고등어 등의 큰 고기를 잡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그렇다고 어민들이 손을 놓으면 생계가 불가능하므로 그때 제주도 어민들이 만들어 타고 다닌 배가 뗏목처럼 생긴 '테우'라는 작은 배이다.


테우를 타고 나가 잡았던 모살치, 멸치, 자리돔 등

이 배를 타고 나가 어랭이(놀래미), 모살치(보리멸), 볼락, 자리돔 등 작을 생선을 잡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제주 전통 음식을 보면 이런 인근 해안에서 잡히는 작은 생선 요리가 많이 있다.

제주도민에게 큰고기나 흰살 생선이 귀한 음식으로 자리잡은 이유도 이런 출륙금지령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옥돔 같은 경우는 제주에서 관광 상품으로도 유명세가 있는데, 그게 이유가 있다.
과거에는 수심 깊은 곳에 살고 있는 옥돔을 잡지 못했었는데, 어업이 발달하여 옥돔을 잡을 수 있게 되자 80년데 일본 관광객들이 대거 제주도에 유입되면서 너도나도 옥돔을 사갔다고 한다.
그래서 유명해진 옥돔은 지금도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있는 상품이고, 제주도민들에게는 제삿상에나 올리는 귀한 생선이 되었다.



꼬리에 있는 노란 줄무늬가 옥돔임을 증명한단다.ㅋ

어쨌든 출륙금지령으로 제주도 어업의 형태가 바뀌었고, 그들의 식문화도 변화가 있었다.
또한 이런 이유로 제주도의 고유 문화와 민간 신앙이 오래도록 보존되기도 했다.

'바릇잡이'란 바닷에서 잡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테우를 타고 나간 남자들이 풍랑에 많이들 목숨을 잃었던 이유도 있고, 어업을 이어갈 사람이 남자들이었던 이유도 있고, 제주도의 민간 신앙의 이유도 있고 해서, 제주도에서는 옛날부터 남자를 귀하게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
집안에서는 아들을 애지중지하느라 정말로 아들들은 집안에서 손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인도 여럿을 들일 수 있었고, 어업을 나가지 않을 때는 술과 노름에 빠져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서 집안일하고, 집밖에서 들일을 하는 것은 언제나 여자들 몫이었다고 한다.
특히나 해녀는 물질을 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제주 여성들의 특이한 직업이기도 하다.
해녀들의 물질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경제활동이었다.
해녀들이 목숨을 담보로 해서 마련한 해산물은 판매를 해서 돈벌이를 해야 했으므로 정작 그들은 갯바위에서 얻는 자질구레한 해산물들을 모아서 집에 반찬으로 만들어 먹었다.
이런 해녀들의 갯바위 등에서 먹을 것을 수집하는 것을 바릇잡이라고 할 수 있다.

'바릇'은 '바다의'라는 제주 방언이다.
해녀들이 바다에서 잡는 자질구레한 것들은 바로 전복, 성게, 소라, 보말, 문어, 게, 미역 같은 것이다.
과거에 하찮았던 해물들이 지금은 보통사람은 먹기 부담스러울 정도의 가격으로 팔리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해녀들의 바릇잡이

보통 집앞에 있는 바다에 가서 대충 30분 동안 바릇잡이해서 저녁 반찬으로 먹었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서 성게는 전복의 먹이가 되는 미역을 먹는다고 한다. 전복을 잡아 돈을 벌어야 하는데 성게가 자꾸 미역을 먹으니 잡아 없애버릴려고 성게를 잡았는데, 다른 해산물은 다 내다 팔고 해녀들은 대충 미역에 성게를 넣어 국을 끓여 먹던 것이 성게미역국이라고 한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성게를 주먹만큼만 사려고 해도 몇만원을 줘야 한다.
보말도 갯바위에 지천으로 붙어 있는 걸 아이들이 낮에 놀면서 따다가 저녁 찬거리로 먹던 것이었는데, 지금은 한공기 정도에 일, 이만원을 한다.

바릇잡이로 생겨난 제주도 음식 문화는 최근 관광 산업이 호황인 제주에서 또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이런 제주의 역사와 문화에서 변화된 제주음식을 한상 차려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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