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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하고 싶은 시들이 모인 책이란다.
그래서인지 제목도 멋진 글씨로 쓰여져 있다.
시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내가 어쩌면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물리학
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달달한 시다.

꽃이 예쁜가요, 제가 예쁜가요
이규보
진주 이슬 머금은 모란꽃을
새색시 꺾어들고 창가를 나나네
빙긋이 웃으며 신랑에게 묻기를
꽃이 예쁜가요, 제가 예쁜가요
짓궂은 신랑 장난치기를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구려
꽃이 더 예쁘단 말에 토라진 새색시
꽃가지를 밟아 뭉개고는
꽃이 저보다 예쁘거든
오늘 밤은 꽃과 함께 주무세요.

-고려문인인 이규보가 정말 맞겠지? 이런 달달한 시를 썼다니… 찾아보니 술을 주인공으로 한 ‘국선생전’이란 글도 썼다. 이 작품은 학교다닐 때 배웠던 기억도 어렴풋이 난다. 뭔가 예술을 아는 사람이었나 보다.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쓸쓸한 시다.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가을날 해질녘에 느껴지는 막연한 쓸쓸함이 생각나는 시다.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라이너 밀케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삶의 의지를 불태워주는 시다.

봄날
김용택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이 책의 제목에 ‘김용택의 꼭 한번 필사하고 싶은 시’라고 부제가 달려 있다.
그런데 정작 김용택의 시는 뒤에 열편만 실려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할 때, 섬진강 강가에 있던 김용택의 생가를 우연히 지났고, 섬진강 물길을 따라 시인의 거리에 돌에 새겨져 있던 김용택의 시는 없었다.
그때 이 ‘봄날’이라는 시는 짧지만 우리의 자전거를 오래도록 잡아두고 있었는데…

어느 무더운 여름 두어 시간 이 책을 읽었다.
그닥 필사하고 싶은 시는 많지 않았다.
나는 시심이 부족한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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