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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언덕' 이후로는 다행히 내리막길이었다.

우와~ 이제 좀 덜 힘들겠다.^^

하며 신나게 걸었다?
왠걸? 올라오느라 힘 들었던 다리가 후덜덜 떨려서 내리막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
게다가 신발 안에서 발이 앞으로 쏠리니까 발가락 끝이 마치 발레리나가 된 것처럼 아팠다.


이렇게 우리의 내리막 길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있는 이정표를 자세히 보면 왼쪽은 걸어서 순례하는 사람이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자전거로 순례하는 사람이 가는 길이라고 되어 있다. 보통은 자전거와 사람이 같은 길로 가는데, 아마도 가파른 내리막 길이므로 서로의 안전을 위해 따로 길을 내준 듯하다.

남편은 참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힘들게 걷느라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남편은 신기한 것이 나타나면 모두 사진기에 담아 두었다.


파란 바탕의 이정표라 지금까지처럼 다음 마을이 얼마 남았는지 알려주는 이정표라고 생각하고 난 그냥 지나쳤는데, 알베르게를 광고하는 간판이었다.
첫날이야, 그날 정해진 목적지까지 그냥 갔지만, 나중에는 걸으면서 이런 정보를 취합해 좋은 알베르게를 선택하는 노하우도 생기게 되었다.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오는 곳이므로 모든 정보는 그림으로 알려준다.
그리고 이렇게 알베르게를 광고하는 안내판이 나오면 곧 마을이 나온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지나가게 된 마을은 아주 볼거리가 많았다.
마을 광장 쯤 왔는데, 아이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 깜짝 공연을 하고 있었다.
마을에 휴양 온 듯한 사람도 많고, 이렇게 자체 행사도 있고 한 걸 보면 여름 휴가나 주말을 보내기에 경치도 좋고, 편의시설도 잘 되어 있는 마을인 듯하다.
말이 잘 통했다면 누구라도 붙들고 물었겠지만 그냥 보는대로만 이해하는 것도 이번 여행의 의미라 생각한 우리는 한참을 쉬면서 구경하고 즐겼다.


아마도 저 건물이 이 마을의 시청이나 구청 쯤 되는 것 같았다. 앞에는 여러 모양의 깃발도 걸려 있고, 마을을 상징하는 문장도 벽에 그려져 있었다. 그 건물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엄청 더운 햇볕 아래서 공연을 했다.


여러가지 도구를 들고 다양한 춤을 보여주었다.


공연은 너무 재밌었는데, 난 다리가 아파 꼼짝 않고 그늘에 앉아 멀리서 구경만했다.
첫날에 오는 다리의 피곤함은 좀 당황스러웠다.
우린 800킬로를 걸어야 하는데, 오늘 걸으면서 한 마을을 만나면 그게 5킬로이기도 하고 다음 마을을 만나면 겨우 4킬로이기도 하고 또 다음 마을은 3킬로이기도 하고 그랬다.
하루종일 정말 걷기만 한다.
특히 우리는 아침에 만난 한국사람에게 듣기를 천천히 걷다보면 2시 전에는 다음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해서 오늘 할당량을 다 걷고 먹자며 점심도 안 먹고 걷고 있었다.
그렇게 밥도 안 먹고 하루종일 그저 걷기만 한 것이다.

걸으면서 작은 마을을 너댓개 만나게 된다는 것도 난, 몰랐다.

도대체 뭔 상상을 하고 산티아고를 걷겠다고 했는지도 까맣게 모르겠다.

목적은 27킬로인데 10킬로 정도 걷고 나니 발이 무거워 발걸음 하나하나가 천근만근이었다.
이렇게 무거운 다리를 끌고 이 땡볕에 계속 걷는 게 산티아고구나 하며 내게 계속 각인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난 첫날 계속 이런 생각만 했다.

‘그래, 오늘 걸으면 산티아고가 뭔진 알겠지. 알았으면 됐지 뭐. 오늘만 걷고 다시 생각해보자.’

‘남들은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벅찬 눈물을 흘린다는데, 난 오늘 당장 너무 다리가 아파 울고 싶어 죽겠다.’

‘남편한테는 하루 걸어보니 산티아고가 뭔지 다 알겠다고 해야겠다.’

‘종교적 신념 없이 이 길은 걸을 수 없는 거 같다. 어쨌든 집에서 나섰으니 유럽 중에서 안가본 나라 두세 군데나 여행하고 돌아가자고 하자.’

‘엉엉.’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먼저 가자고 한 산티아고이니 첫날은 맘껏 산티아고를 느끼자며 열심히 충실히 걸었다.


산티아고에 자전거로 가는 사람도 많다.
일반 자전거는 아니고 MTB자전거이다.
자전거 뒤에 짐가방을 양쪽으로 하나씩 두개를 달고 가거나 어깨에 커다란 베낭을 짊어지고 자전거를 타고 간다.

오늘 걸은 길은 돌길도 많았고 엄청 높은 언덕에도 올라야 했고, 오르막과 내리막도 많았다.
배낭을 짊어지고 한걸음씩 걷는 우리랑 허벅지가 터지게 패달을 밟으며 가는 자전거랑 누가 더 쉬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자전거족을 만날 때마다 우리도 한번쯤은 우리 자전거로 산티아고를 와봐도 되겠다고 생각은 해봤었다.
우선 언제고 자전거족과 친구가 되면 힘든지 어쩐지를 물어보고...ㅋ

산티아고 길에 펼쳐진 밀밭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산모양 그대로 땅을 개간해, 산모양 그대로 밭이 생겨, 산모양 그대로 노란 밀이 살랑거리고 있다.
전직 농사꾼이었던 우리 눈에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아무리 기계로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날 로타리를 쳤을까, 얼마나 많은 밀씨든 모종이든 심었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 관리를 했을까, 얼마나 많은 양의 밀이 나올까?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이 가지 않는 규모이다.
밀밭에 경계도 없는데 이 산 하나는 김씨아저씨 꺼, 저 산 하나는 박씨아저씨 꺼, 뭐 이렇게 관리하나?
어떻게 상상해도 놀라웠다.

어떤 분은 넓디 넓은 스페인의 밀밭을 보고 "산에 모든 나무를 없애고 흔하디 흔한 빵쪼가리 만들겠다고 자연을 다 죽여 놓았다"고 개탄을 하셨다.
하지만 우리같은 농사꾼이었던 사람 눈에는 밀도 생명이니 귀한 것이고, 그 밀로 만든 빵을 또다른 생명이 먹고 사니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우리끼리 숙덕거렸던 생각도 난다.


어쨌든 난 강렬한 태양에 약간씩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꽃들고 좋다고 사진도 찍어가면서..ㅋ


우리의 오늘 목적지인 '%&^&% 레이나 &^%&'(이름이 너무 길고 어렵다. 난 언제나 쉽게 줄여서 모든 이름을 불렀다.)라는 마을의 이정표가 나왔다. 4.5킬로만 가면 된다고는 하지만..ㅠ

이렇게 마지막 목적지 마을에 들어서니 아직 숙소는 보이지 않는데 마지막 고비가 찾아왔다.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뜨거운 태양이 그대로 반사되는 지글지글 끓는 오르막길이다.

까마득한 오르막이 눈앞에 펼쳐진 바로 그 시점에 있는 어떤 집 앞에 좌판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런 깜찍한 아이 보소.
딱 봐도 의리의리한 저택에 주차장에는 멋진 카라반도 주차 되어 있는데, 이 꼬마는 작은 수레에 좌판을 벌려놓고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한잔씩 주고 있었다.
비용은 donation(기부)이라고 적어놓고선.
아무리 봐도 짭짤한 수입이다.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맹랑한 녀석과 사진 한장을 찍었는데, 녀석 왜 이렇게 잘 생긴거지?

산티아고 길을 걷다보면 다양한 형태의 도네이션 코너가 있다.
첫날이어서 이 아이를 보고 참 신선했는데, 도네이션 코너의 법칙이 있다.
마을과 마을 사이 끝없는 길에 그늘도 없다면 그 중간에 도네이션이 있다.
오르막 길을 숨가쁘게 올라가면 딱 그 정상에 도네이션이 있다.
마을이 너무 작아서 카페나 바가 생기지 않았다면 거기에도 도네이션이 있다.
며칠 걷다보면 곧 도네이션 코너가 나오겠군 하고 감이 온다.
일종의 '도네이션 법칙'이다.


걷다보니 벌써 신발을 벗어던져 전기줄에 걸고 간 사람의 신발이 있었다.
저렇게 벗어 던지고 가면 뭘 신고 갔지? 이런 것도 순례자들을 위한 이벤트일까?


이쯤 되면 예수님의 고난도 실감할 판이다.

마을 중심으로 오니 알베르게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 뭔 준비가 되어 있겠어.
어떤 알베르게에 묵을지도 생각해 보지 않고 왔다.
그래도 숙소 예약에 탁월한 노하우가 있는 남편은 끝내 좋은 알베르게를 직감으로 알아냈다.
하지만 이미 나는 너무 힘들어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그때서 알베르게를 찾아야 하는 현실에 눈물이 핑돌았다.
아직 오늘의 고통이 끝나지 않았단 말인가?ㅜㅜ


지금 사진을 봐도 난 홀린듯 마을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어쨌든 남편은 평점 좋은 알베르게를 인터넷에서 찾아 체크인를 했다.
리셉션에서 남편이 체크인을 하는 동안 난 완전히 울기 직전이었다.
리셉션아가씨가 남편에게 “그녀는 괜찮니?”라고 묻는 걸 들었다.
난 기회만 되면 앙~하고 울음을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때 마음 먹고 있었다.
짐 풀고 씻고 점심도 못 먹어 굶주린 배를 채우러 식당에 가면

“우리 그만 걷자.”라고 선언하겠다고.

지친 우리가 신발가게에 가서 슬리퍼를 사겠다며 가게 위치를 물었더니, 친절한 리셉션 아가씨(수산나)가 우리를 위해 순례자들이 놓고간 슬리퍼 중 가장 예쁜 걸로 골라 두개를 주었다.
아마도 수산나가 보기에도 우리가 신발을 사러갈 수 없을 정도로 지쳐 보였던 모양이다.
친절하고 유쾌한 수산나 덕에 우린 슬리퍼를 안 사도 되게 되었다.


우리가 득템한 슬리퍼. 우리 발에 있는 핏줄이 한껏 화가 나 있다.ㅋ

오늘 이 길을 걸으며 두어번 숨이 깔딱 넘어갔고, 두어번 발바닥이 찢어지게 아팠다.
반쯤 지나고 나니 숨이고 발바닥이고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젊은 사람들은 12시쯤이면 다 걷고, 걸음이 느린 사람은 2시쯤이면 다 걷는다는데, 우리는 자그마치 4시에 오늘치의 걸음을 끝낼 수 있었다.
그래도 우려했듯 60만 걸음도 26만 걸음도 아니었다.

43,650 걸음.

생각보다 많진 않았지만, 나의 한계는 2만 걸음에서 왔다.
내일 일어나면 다시 걸을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

이렇게 힘든 걸음을 걷는 이유가 뭘까?
우리는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심각한 이야기를 나눴다.
남편은 “내일 일어나서 보고 못 걷겠으면 버스타고 가자.”며 난지 자신인지를 달랬다.

아침에 같이 조식을 먹었던 한국 아저씨의 말이 생각난다.
"한국에서는 내 나이 사람을 다 영감쟁이라고 부르는데, 여기 오니 모든 사람이 나를 미스터킴이라고 불러 기분이 좋다."
아마 그 아저씨는 그 기분만으로도 걷는 이유가 있었을 듯하다.

시에스터 시간이라 제대로 연 레스토랑도 없어서 바에서 타파스 한 그릇에 맥주를 마시며 우린 멍해졌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숙소에 돌아와 코를 골며 자는 외국 아저씨와 우리처럼 한껏 지친 외국 아가씨들과 한방에서 잤다.
난 세탁한 빨래를 널데가 없어서 좌충우돌하고 있는 남편에 아랑곳 않고 침낭 속에 들어가 '그만 걷겠어.'라는 생각만 했다.
여전히 낯선 이층 침대였지만 어느 샌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진짜로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며...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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