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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0일

산티아고에 도착해 겨우 하룻밤을 자는데에도 우린 많은 것을 알았다.
우선 우린 한잠도 자질 못했다. 시차 때문인지 산티아고를 걸을 것을 염려한 때문인지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이곳의 더위 때문이었는지 밤새 잠을 설쳤다. 산티아고는 매우 더웠다.

알베르게에서 공동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 슬리퍼가 필요하다는 것도 몰랐다.
순례길을 걸으며 땀이 많이 난 신발은 발냄새가 나기 때문일까? 대부분의 알베르게에서는 순례할 때 신은 신발을 로비 옆에 있는 방에 벗어 놓고 숙소로 들어가길 요구한다.
우리는 걸을 때 신을 트레킹화만 신고 왔다. 슬리퍼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시설이 깨끗한 편이어서 침실에서는 맨발로 다녀도 무방했지만 화장실과 샤워장을 다니기에 좀 비위생적이고 불편했다. 당장 슬리퍼를 사야할 듯하다.

밤새 잠을 설치고 새벽부터 일어나 출발 준비를 했다. 다른 사람들도 매우 이른 시간부터 부시럭거리며 출발 준비를 하고, 이미 출발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아침에 씻는데 한국사람을 또 봤다.
우리 나이 또래인 듯 보이는 분인데, 하루 20킬로 정도만 그것도 천천히 걷기 때문에 걸을 만하단다. 그들도 어제 새벽에 6시 반에 출발해서 낮 1시 반쯤 도착했단다. 발이 좀 아프고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남들 다 걷고 있으니까 그냥 따라 걷게 된다고.
젊은 사람들은 12시 전에도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한다고 한다.
오호~ 걷는 게 그닥 어렵지 않단 말이지?

알베르게 앞에 있는 카페에 어제 사놓은 식권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간단한 빵과 햄, 그리고 커피와 음료를 주는 아침 식단이었다.
숙소에 묵었던 사람들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아침을 먹으면서도 또다른 한국 사람을 만났다.
이날 아침엔 우리도 좀 긴장한 상태여서 통성명은 못했지만, 나중에 길에서 자주 만나서 알게 된 아저씨의 이름은 ‘김경석’이라고 했다.
이 분도 걷는 게 그리 힘들진 않다고 하신다.
내가 “어제 숙소에서 보니 발에 상처가 나서 약 바르고, 대일밴드 붙이는 사람도 꽤 있던데요?”라고 물었다.
아저씨 말이 “그건 잘 못 걸어서 그래요. 너무들 서둘러 걷더라구요. 천천히 걸으면 발에 상처날 정도는 아니에요.”라고 말씀하셨다.
연세도 많으신 아저씨의 말이니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드디어 아침을 먹고 알베르게를 떠나 첫발을 내딛었다.
새벽이라 공기도 차갑고 스산해서 가슴이 설레임으로 콩닥콩닥 뛰었다.
숙소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는데, 막상 출발하려니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상황 파악이 안됐는지, 아님 도시가 커서 사람들이 각자 묵었던 숙소에서 나와 여기저기로 움직여서인지, 내가 상상한 대로 외길로 순례자들이 줄줄이 걷는 형국은 아니었다.
숙소를 들락거리며 짐을 챙기는 사람, 앞에 있는 카페로 아침을 먹으러 가는 사람,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나오는 사람,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 먼저가라 나중에 가겠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람.
우리 둘은 잠깐 서서 분위기를 파악해 보았다.
그래도 눈치 빠른 남편이 “저쪽으로 가는 거 같다.”라고 말해 한두명의 배낭족을 따라갔다.
그땐 몰랐는데, 우리가 너무 늑장을 부린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6시가 되기도 전에 모두 길을 나선 것을 몰랐다.
우린 씻고 짐 정리하고 느긋하게 아침 먹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면서 너무 늦게 출발한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늦게 출발했는지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길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아무튼 이렇게 어리둥절하게 우리의 순례길이 시작되었다.
팜플로냐는 꽤 큰 도시라 도시를 빠져나가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나는 막 멋진 산과 들을 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걸어도 걸어도 계속 도시라 좀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를 알려주는 이정표이다. 여기서 출발하면 되겠지?


골목을 벗어나니 조그만 광장도 있다. 그런데 어째 사람들이 안 보인다.
산티아고 '길'이랬는데, 여긴 그냥 마을 '길'이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디로 간 거지?


앗! 저 사람 베낭도 매고 지팡이도 짚고 열심히 어딘가로 걸어가는 거 보니, 아마도 산티아고 순례객인가 보다. 얼른 쫓아가자.


엄청난 스피드로 걷던 청년을 놓쳐 버렸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마을'길'... 이렇게 가는 게 맞는건가? 우리는 언제 사진에서 보던 것 같은 멋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거지??


그러더니 개미만하게 나타난 한무리의 순례객들이 보인다. 이번엔 놓치지 말고 잘 따라가자.


그들을 따라서 간 곳에는 도시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공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공원에는 순례객이 아닌 공원에서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ㅜㅜ 우리는 첫날부터 길을 잃었나 보다..


앞에서 걷는 남편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긴 마찬가지이다.


어떡해?ㅜㅜ 터덜터덜.
그냥 이렇게 가면 돼? 투덜투덜.

그러더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너무도 반가운 산티아고의 상징, 화살표와 조개껍데기였다. 너무나 반가웠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이나 조개살이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가면 이제 절대로 길을 잃지 않는다.



멋지다 조개 껍데기.


"여기는 산티아고 길입니다. 베낭을 메고 지팡이를 짚으신 순례객님들, 이쪽으로 가세요."라고 쓰여 있다, 그림으로 ㅋ


누군가 우리처럼 엄청나게 헤매다 이 이정표를 봤는가 보다. 반가움에 뭔가 스티커를 붙여놓고 낙서도 하고 갔다.


바닥에 박혀있는 작은 쇠붙이도 지나쳐 가면 안된다. 이것도 이 길이 산티아고 순례길임을 알려주는 이정표이다.


반갑고 고마운 이정표. 이제 이 이정표는 우리의 동행이다. 가자, 이정표.

도서관에서 <살면서 길을 잃었거든 산티아고에 가라>라는 제목의 책을 본적이 있다.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혹여 살면서는 길을 잃어 헤매더라도 여기 산티아고에 와서는 절대로 길을 잃지 않을 것이란 뜻의 제목이 아니었을까?
가다가 갈림길에서 만에 하나 표시가 없으면 직진하면 되고, 길을 잘못 들어서면 화살표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 잘 찾아보면 어딘가에는 표시가 있고, 혹시 길을 잘못 들어 길을 잃는 만의 하나에 경우가 생기지 말라고 많은 사람들이 돌로 표시를 해 놓기도 하고, 복사된 화살표 종이도 돌에 괴어 놓고, 바닥에 지팡이로 화살표를 그려 놓기도 하고 했다.
또 순례길에 여러번 경험했지만 순례자들이 길을 잃어 헤매거나 혹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본 스페인 사람들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아주 잠깐만 두리번거려도 어디선가 나타나 길을 알려주고 바로 잡아준다. 신기하게도.
그러니 여기서 어떻게 길을 잃을 수 있겠는가?

이제 커다란 공원을 빠져나오면서 팜플라냐라는 도시를 벗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이정표도 그냥 우리가 갈 길을 알려주는 화살표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남편이 알아낸 건데, 다음 마을까지 몇 킬로가 남았는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첫번째 마을은 17. 2킬로가 남았으며, 그 다음에는 8.4킬로를 가야 마을이 있다는 표시였다.
첫날 우리가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던 이정표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우린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러니 갈림길에서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순례자님, 왼쪽으로 가셔야 산티아고입니다."


우거진 나무 때문에 혹여나 길이 안 보이 것 같은 곳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이정표가 있으니까.






그래, 이거야. 이제 우리도 순례자가 된 거지.
자, 순례길을 떠나 보자구~~
드디어 우리가 상상하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빠지면 아쉬운 그림자 사진들.
사람들이 산티아고를 걸을 때 왜 자꾸 그림자 사진을 찍는지 알게 되었다.
순례자들은 새벽같이 숙소를 나와 서쪽에 있는 산티아고를 향해 걷는다.
우리가 온 6월이면 오전 6시 전후로 해서 해가 뜬다.
동쪽에서 뜨는 해는 그러므로 순례자들의 등 뒤에서 뜬다.
그러다 보니 새벽에 나서서 한참을 걷다보면 등 뒤에서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자신의 그림자가 아주아주 길게 내 발 앞에서 뻗어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꼭 서커스장에서 나무 다리에 올라선 삐에로처럼 긴 다리를 가지고 뒤뚱뒤뚱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 그림자를 밟고 걷는 느낌이 아주 특이하다.
나를 거울에 비춰볼 때의 느낌이 들기도 하고, 내가 키다리가 된 거 같기도 하고, 특히 매우 날씬해 보인다.
어쩜 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에 순례자가 된 나의 모습에 반하는지도 모르겠다.
또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산티아고 길을 걷기도 한다.
그러면 걷는 내내 자기 사진은 없고 앞서가는 사람의 뒷모습만 찍거나 길 주변의 경치만 찍게 되는데, 아침 이 시간이 바로 그림자이지만 자기의 사진도 사진기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도 초반에 우리가 늦게 출발해서 그림자 놀이에 더 심취했던 것이다.
우리보다 더 일찍 길을 나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과 함께 더 멋진 일출의 모습도 보기 때문에 해가 떠오를 때의 멋진 풍경도 많이들 찍는데, 우린 이때만 해도 해가 뜬 후에 출발했기 때문에 일출은 못 보고 이렇게 그림자 놀이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 멀리 펼쳐진 풍경 속을 하염없이 걷는 사진.
이런 사진 진짜 꼭 찍고 싶었다.
산티아고를 걷는다고 계획하면 우선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땅크기를 지도에서 보고 우리나라와 크기를 비교해 본다.
그 나라를 동쪽에서 서쪽까지 가로지르는 코스를 걸어서 간다는 것을 지도에서 그려보게 된다.
아마 서울에서 부산을 걸어서 갔다가 오는 거리를 걷는구나하고 생각하면 그 거리를 어느 정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정작 스페인에 와서 보면 우리나라보다 산이 가깝게 보이지 않고 넓게 펼쳐진 땅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한 지평선을 보게 되면 땅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는 느낌을 실감하게 된다.
눈으로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과 땅끝을 배경으로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낯설다.
이런 거 핸리캠같은 걸로 한번 찍혀 봤으면 하는 생각도 많이 든다.
이런 낯선 풍경 속에서 자신이 걷고 있는 사진을 보면 매우 이색적이다.
한번쯤 앞으로 한참을 뛰어가서 점처럼 찍혀보고 싶지만, 정작 걸을 때는 걷는 것도 힘들어 뛰질 못한다.
그리고 첫날은 구름 한점 없는 하늘 아래 벌판에 떨어져 갑자기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다는 게 큰 부담감으로 왔다.
오늘 우리가 얼마나 걸어낼지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날이었기 때문에, 사진 한장 건지자고 힘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사진 찍기 좋아하는 남편은 산티아고를 열심히 걷고 있는 내 모습을 카메라에 많이 담아주었다.
처음엔 전부 밀밭으로만 알았던 노란 밭(나중에 알고 보니 밀밭이 있고 보리밭이 있었다)과 산등성이에 세워진 풍력발전기(바람개비), 들풀들, 흙길, 자갈길 등을 배경으로 걷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순례자 분위기가 물씬 난다.

출발과 함께 펼쳐진 새로운 풍경과 사진 찍기 놀이, 순례자가 된 야릇한 기분은 어떻게 설명하기도 힘들다.
이제 우린 순례길에 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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