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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에게도 1년이란 시간이 주어졌다.
딱히 누가 준 시간은 아니고, 그냥 우리 둘이 생활과 돈에 쫓겨 살던 삶을 잠시 쉬고 1년 정도 쉬어 보기로 했다.
한참 일할 나이에 그렇게 생각하면 안될 일이다.
아무리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우리를 보았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에게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1년을 쉬기로 했다.

살다가 쉼표를 찍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수중에 있는 돈이 떨어질 때까지 쉬겠다고 생각하니 돈이 줄어드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다.
막연히 1년이라고 했지만, 더 길어질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쉴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좋겠지만 마음은 더 불안하다.

남편과 난, 경북 상주로 귀농해 9년간 농사꾼으로 살았었다.
하던 농사 다 접고 우린 꼭 살아보고 싶던 제주도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않고, 그간 읽고 싶었던 책 많이 읽고, 쓰고 싶었던 글을 써 보겠다며 계속 도서관에 다녔다.
가끔 제주도 곳곳을 다니며 여행자처럼 지내기도 했다.

농사를 지을 때 겨울 농한기가 되면 한달 정도 시간을 내서 해외여행을 했었다.
남편도 나도 유럽을 좋아해서 유럽으로만 다녔다.
그러다가 어쩌면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꼭 해보고 싶었던 여행이기도 하고 해서 우리는 무작정 산티아고에 가기로 했다.

남들은 산티아고에 가려고 일부러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며 걷기 예행 연습도 하고, 산티아고 관련 책을 보거나, 산티아고 커뮤니티에 가입해 많은 정보를 수집한다고 한다.
하지만 대책이 별로 없는 우리, 가볼까?하는 생각을 하고부터 일주일 후 쯤 스페인 마드리드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매해 버렸다.
그것도 이틀 후 출국하는 것과 한달쯤 걸린다는 건 알고 왔다갔다하는 시간 감안해 35일 후에 돌아오는 비행기표로.
그렇게 무작정 우리 둘은 산티아고에 가기로 했다.

살면서 길을 잃지는 않았지만.
올레코스 하나도 완주한 게 없지만.
잘 걷는 것도 아니지만.
많은 정보를 찾아보진 않았지만.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

800킬로나 된단다.
한달은 걸어야 한단다.
하루에 평균 26킬로는 걸어야 한단다.
신발이 다 헤진단다.
살이 쪽쪽 빠진단다.
발에 물집이 왕창 잡힌단다.
끝없이 걷다가 ‘내가 여기 와서 뭘하는 거지?’하는 생각만 든단다.

그래도.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

제주에 예쁘고 편안한 집이 있다.
일년이라는 휴식의 시간도 있다.
돈은 별로 없지만, 딱히 구애받지 않는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다.
도서관에서 책도 꾸준히 잘 보고 있다.
잘 쉬고 있다.

그래도.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

어쩜 좋겠어???

우리 둘이 고민할 때 내가 SNS에 올려놓은 글이다.
대부분 무작정 가라고 했다.
일초라도 젊을 때 가라는 사람도 있었다.
용감하다고 해주는 친구도 있었다.
열망이 부럽다고 해주는 지인도 있었다.
한두명 빼고 모두 등떠미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준비 시작~
제주도에서 마드리드 가는 왕복 티켓 예매하는데 일인당 102만원 정도로, 둘이 204만원 들었다.

편한 트레킹화.
등산화를 신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우리 생각에는 트레킹화로도 충분하리라고 여겨졌다.
결론은 우리 생각이 맞았다.
어떤 사람은 스포츠 샌들을 신고도 걷는다.
우선 가장 자기 발에 편한 신발로 등산화나 트레킹화면 된다고 본다.

걸으면서 입을 옷과 잘 때 입을 옷.
멋지게 유럽 여행을 가는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선 스페인의 여름은 태양이 작렬한다니 반팔, 반바지는 피했다.
유럽의 태양은 한국과 다르다.
태양에서 오는 빛이 그대로 살에 화살처럼 꽂히는 느낌이 든다.
겨울에만 가본 유럽이라 여름의 유럽을 우리가 상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겨울의 태양빛도 맑은 날은 내리 꽂혔으니 여름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초반에 살이 타서 물집 생기고 살갗이 벗겨지고 그러면 힘들 듯해 팔토시, 워머, 손가락 장갑, 챙 넓은 모자까지 준비했다.
이 또한 결론적으로 거의 맞는 생각이었다.

양말도 갈아 신을 것 두개, 속옷도 갈아 입을 것 두개, 손수건, 타월, 비누, 세면도구까지 최대한 챙기되 배낭의 무게가 몸무게의 10분의 1이 되게 하라는 원칙을 지켰다.

숙소가 침대만 있다고 해서 침낭을 준비했다.
집에 있는 침낭은 옛날 거라 부피를 많이 차지한다. 무게도 1.6킬로.
이건 안되겠다.
인터넷에서 초경량으로 구매한 것은 너무 얇은 천쪼가리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실패.
제주도에 있는 아웃도어점을 모두 뒤져 겨우 900그램짜리 침낭 두개를 마련했다.
침낭은 여러 모로 필수 준비물이다.

이렇게 해서 남편의 배낭을 8.5킬로에, 내 배낭을 4.5킬로에 맞췄다.
남편이 우리 두사람의 침낭을 모두 자기 배낭에 넣어서 몸무게에 비해 좀더 무거웠다.


내 짐은 이렇게 너무 간소했다.

여행은 충동이나 여유로 가는 건 아니다.
“취미가 뭐에요?”
“여행입니다.”
이런 말은 마땅한 대답이 없어 하는 성의 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가게 된 우리를 생각해 보면 여행은 진짜 취미다.

다큰 어른이 쓸데도 없어 보이는 피규어를 사 모으는 걸 보면 취미란 중독과 비슷하다.
특별한 목적의식은 없지만 그걸 하지 않으면 삶의 목적을 잃은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니 누구도 남의 취미에 대고 개인의 의견을 말하는 건 실례다.

긴 여행을 준비하는 우리도 그랬다.
다큰 어른이 갑자기 돈벌이 없이 제주도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여행자처럼 일년을 목적없이 쓰기로 했다.
수중에 돈도 많지 않다.
일년 쉬고 나면 빈털털이가 될 예정이다.
그런 와중에 긴 여행을 계획하는 건 더 큰 무리수다.
주머니에 남은 마지막 동전을 꺼내쓰는 느낌이다.
한달간 알바를 하면 다만 얼마라도 수중에 돈이 들어오겠지.
그런데 우린 마지막 동전을 꺼내 한달간 여행을 하기로 했다.
이런 게 중독인 것 같다.
여행을 하면 뭔가 얻어오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한 경험으로는 더 심한 중독에 걸려올 뿐이다.
삶이 여행이라고?
아무리 미화를 해도 우린 다큰 어른이 대책없는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여러 날을 이렇게 마음이 종잡을 수 없었다.
남편도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마음이 바뀌는 것 같았다.
많이 고민했지만, 다녀와 생각해 보니 “고민하다 포기했으면 어쩔 뻔했어?”하는 생각이 더 크다.

가기 전날까지 남편은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넌 못 걸을 거야."
"엄청 힘들데."
"이 시점에 이 일이 우리한테 중요해?"
온갖 걱정의 말을 하루에도 수십 개를 쏟아냈다.

얼마나 갈등이 생겼는지, 남편은 혼자서 타로 카드로 점을 쳤다.
결론은 떠! 나! 라!로 나왔다.
그래서 남편의 고민도 깔끔히 해결됐다.ㅋㅋ


세개의 타로 카드 중 하나.

이렇게 우리의 산티아고 여행은 아무 준비 없이 그냥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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